개봉 며칠을 앞두고 설경구와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사실 설경구는 인터뷰 하기에 그리 무난한 배우는 아니다. 그가 지나온 필모그래피를 보면 ‘설경구’는 활화산이다. ‘박하사탕’ ‘오아시스’ ‘공공의 적’ 시리즈, ‘실미도’ ‘해운대’ ‘타워’ 등 하나 같이 강력하다. 반대로 해석하자면 설경구는 배우로서만 존재하고 배우로서만 대중과 소통하는 진짜 배우로서 남고 싶은 욕구가 커 보였다.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요(웃음) 그런 거 전혀 없어요. 그냥 말 주변이 별로 없어서 그래요. 내가 그렇게 달변도 아니고 작품이 끝나고 언론과 인터뷰를 할때마다 간혹 대하기 어렵다는 말도 들었는데, 글쎄요. 작품에 좀 집중을 하고 끝나고 나면 기운이 많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에요. 배우들 대부분이 다 그래요. 그 정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문제인데, 난 아직도 멀었나봐요. 하하하.”
그는 충무로에서 강렬한 연기, 메소드 연기 혹은 관객의 혼을 빼놓는 연기의 소유자로 정평이 나 있다. 이미 그의 얼굴을 본격적으로 알린 1999년 작 ‘박하사탕’을 통해 대중들은 그것을 확인했고, 15년이 지난 현재까지 설경구는 ‘믿고 보는 배우’로 인식하고 있다. 이번 ‘나의 독재자’를 통해서도 그는 다시 한 번 그것을 증명했다.
“작품 선택이라, 대부분 이런 질문에 작품이 좋았다. 감독을 믿었다. 그렇게 말하는 데 이번에는 좀 틀려요. 우선 호흡이 워낙 긴 영화였고, 나도 좀 두려웠어요. 처음 느낌은 그냥 굉장히 무거웠어요. 완성본과 달리 대사도 아주 쎄고, 무엇보다 분장이 엄두가 안났죠. 하하하. 근데 감독님을 만난 뒤 다시 읽어봤는데 이상하게 가볍게 다가오더라구요. 그때 문득 든 생각이 ‘인생이 코미디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언제 내가 이런 부담스런 역할을 해봤었지’란 기억도 들고. 그런 생각이 극중 성근이란 인물과 맞닿으면서 욕심을 한 번 내봤죠.”
설경구가 연기한 인물은 무명의 연극배우다. 이 인물은 20년이 넘는 세월을 자신이 김일성이라고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착각인지 실제인지는 영화 속에 등장한다. 하지만 중요한 포인트는 설경구가 연기한 김성근이란 인물이 김일성이란 배역에 잡아먹혔다는 것이다. 설경구는 ‘잡아먹혔다’고 표현했다.
“그게 그래요. 내가 김일성을 연기하면 크게 끌리지는 않았을 거에요. 하지만 이건 김일성을 연기하는 김성근을 연기해야 하는 작업이잖아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그랬을까. 안타깝기도 하고, 예전 내가 극단에서 생활할 때의 기억이 조금 떠오르기도 하고. 또 가장 컸던 점은 되게 무섭기도 했어요. 김성근이 무서웠을 것이란 생각도 들고요. 일부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케이스가 분명 존재하잖아요. 나도 분명히 경험을 해봤구요. ‘박하사탕’때 그 후유증이 정말 몇 년을 이어가더라구요. 너무 빠지니깐 주변 사람들도 힘들게 되더라구요. 그런 기억이 좀 많이 떠올랐죠.”
배역에 먹혀버린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심정이 고통스러웠음은 짐작으로도 충분히 공감이 됐다. 하지만 진짜 고충은 그의 외형적 변화다. 특수분장을 통해 설경구는 김일성으로 변신해야 했다. 이미 설경구는 충무로에서 고무줄 체중으로도 유명하다. 한때 ‘역도산’을 찍으면선 수십kg의 몸무게를 늘렸다 다시 빼기를 반복했다. 이번에도 꽤 많은 체중을 늘렸단다. 물론 얼만큼인지는 이제 비밀이라고. 그것보다 더한 특수분장이 그를 괴롭혔단다.
“이번에도 꽤 많이 불렸죠. 그런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진짜가 따로 있더라구요. 특수분장을 하는 데 이게 한 5시간이 걸려요. 매일 촬영이 아침 7~8시에 시작을 하니 난 새벽 2시부터 스탠바이에요. 그럼 나만 그런가. 분장 감독님에 옆에서 같이 하는 스태프까지. 아주 죽을 맛이었어요. 또 분장 다하고 촬영을 하는데 잘못 움직이면 이게 떨어져요. 그럼 이건 보수가 안된대요. 그날 촬영이 끝이지. 그래서 항상 내 분량을 제일 먼저 찍고, 끝날 때까지 송종희 분장 감독은 초긴장 상태로 내 옆에 붙어 있고. 이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더라구요. 어휴.”
그의 특수분장을 맡은 송종희 분장감독은 영화 ‘은교’에서 박해일을 70대 노인으로 탈바꿈시킨 막강한 실력자다. 외모야 송 감독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내적인 완성도는 오롯이 설경구의 몫이었다. 김일성은 이미 20년 전 사망한 인물이다. 기억 속에서도 어렴풋하다.
“우선 내 북한 사투리를 가르쳐주시던 분이 새터민이신데, 실제 김일성을 본 적이 있다고 하셨어요. 외모적으로도 많이 비슷하다고 하셔서 속으로 우선 ‘다행이다’ 했죠(웃음). 사실 김일성을 완벽하게 살리려고 하진 않았어요. 난 어디까지나 김일성을 연기하는 배우를 연기해야 하니깐. 김일성 관련 동영상을 좀 봤는데 가래 끓는 목소리, 더듬거리는 말투가 있더라구요. 그 특징만 좀 살리려했죠.”
그렇게 김일성이 된 설경구는 ‘나의 독재자’ 속에서 20년의 시간 여행을 한다. 설경구는 영화 속에서 주요 포인트를 공개했다. 이 부분을 인지하고 영화를 관람한다면 김성근이 왜 김일성이란 배역에 먹혀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내 생각은 사실 이래요. 아마도 김성근은 김일성이란 배역에서 못빠져 나오고 먹힌게 아니라 스스로 빠져 나오길 거부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런 자신의 결정이 아들에게 미안했을까. 김일성으로 살기 시작한 후부터 성근은 아들의 눈을 단 한 번도 똑바로 보지 않아요. 마지막 청와대에서 성근의 독백 장면을 잘 보면 대통령이 아니라 오장관(윤제문)쪽을 쳐다봐요. 사실은 그게 오장관을 보는 게 아니라 CCTV를 보는 거에요. CCTV를 통해 자신의 연기를 볼 아들 태식(박해일)을 바라보는 거죠. 그 장면으로서 김성근 평생의 연기가 끝을 맺는 거에요. 아이고 눈물나네. 하하하.”
영화 속에서 김성근은 아들 태식에게 “아버지가 일생일대의 연극을 한다고 했잖아”라며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 대사의 반대편에 마지막 하이라이트 독백신이 있었다. 그 장면을 통해 ‘나의 독재자’는 김성근이란 인물의 얘기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가슴 먹먹한 부성애를 그리는 마침표를 찍는다. 혹시 설경구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을까.
“아버지 많이 떠올랐죠. 우리 아버지, 글쎄요. 많이 엄하셨고 지금도 저랑 안친해요(웃음). 우리 세대의 아버지들 다 그렇잖아요. 무뚝뚝하고, 안돼, 하지마, 이런 말을 많이 하시고. 어떻게 보면 ‘독재자’셨죠. 그런데 내가 아버지가 되고 보니 표현을 안하신거지 참 살가운 분이셨구나란 생각도 들어요.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무작정 내게 빵 하나 사주고 싶어서 부대에 왔었다는 말을 뒤늦게 알게 됐죠. 물론 못보고 가셨죠. 그냥 자신의 위치에서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셨던 게 아버지 같아요. 많이 외로우셨을 거에요. ‘나의 독재자’를 찍으면서 아버지 세대에 이해를 하게 된 계기도 있어요.”
현재 여진구와 함께 전쟁 영화 ‘서부전선’ 촬영에 한 창인 설경구다. 잠시 아버지와의 추억 속에 빠져 얘기를 나누던 그는 ‘서부전선’에 대한 얘기로 쉼표를 찍었다. 이후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독재자’고 그렇고 전쟁 영화인 ‘서부전선’도 그렇고, 설경구는 한 번도 쉬운 작품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 사실 배우에게 쉬운 작품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유독 설경구는 자신을 혹사시키는 쪽을 선택한다.
“그냥 평범하게 가는 것도 좋은데 자꾸 힘든 작품들만 들어오네요. 하하하. 내 기억에 내가 제일 고생했던 건 ‘역도산’ 같아요. 그건 지금 생각해도 내가 미쳤었단 생각이 들 정도니. 하하하. 만약에 ‘역도산’과 ‘나의 독재자’를 놓고 꼭 한 작품만 다시 한 번 더 찍어야 한다면 뭘 하겠냐구요. 그냥 배우 그만두고 은퇴할래요. 하하하.”
설경구는 인터뷰하기 쉽지 않은 배우다. 직설 화법이 때론 인터뷰어를 곤욕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설경구가 진짜 배우로서만 대중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욕구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설경구가 출연한 영화는 지금도 폭발의 여운이 남아 흐르고 있지 않은가. ‘나의 독재자’도 당분간 그 여운의 한 줄기를 담당할 것 같다. 그 중심에 설경구가 있으니.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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