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전도연은 어려운 역할만 도맡아 왔다. 아니 고집했었다. 사실 고집했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저 전도연이기에 저 정도의 ‘힘든 배역’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란 당연함으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대중이 그랬고, 영화계 관계자들이 그랬고, 일부 감독들도 그랬을 것 같다. 우선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려운 배역이라면 ‘전도연’이란 이름 석 자가 떠오르는 건 이제 당연한 순서다.
“‘너는 내 운명’부터였나. ‘밀양’부터라고 해야 하나. ‘하녀’ ‘집으로 가는 길’ ‘무뢰한’ 뭐 전부 쉽지는 않았네요. 그러고 보니(웃음). 이번도 어려웠죠. 우선 액션도 많고, 거기에 맹인 연기라고 하니. 눈이 얼마나 아프던지. 하하하. 사실 어려운 배역만 쫓아다닌 게 아니라 쉬운 얘기와 인물에 호기심이 안 생기는 게 맞다고 해야 할 거에요. 배우라면 다 그럴거에요. 어쩌겠어요. 내 취향이 그런데. 하하하.”
어려운 얘기, 힘든 배역이란 호기심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점은 아무래도 여성 중심의 시나리오 흐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배우 실종, 혹은 여성 영화 실종이란 충무로의 영원한 풀리지 않는 숙제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 점에서 ‘협녀’는 반갑고도 또 반가운 작업이다. 여배우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만하다.
“제목부터 ‘여자’가 들어가잖아요. 항상 여성은 액션 영화에서 남자에게 보호 받는 주류에서 좀 벗어난 배역으로만 그려져요. 좀 그게 불만이에요. 여자들도 잘 할 수 있는데(웃음). ‘협녀’는 우선 초기에는 여검객 세 명의 얘기였데요. 박 감독님에게 들은 얘기로는 그랬어요. 정말 호기심이 생겼죠. 물론 여러 수정 끝에 이번 얘기가 나왔고. 더 묘했던 것은 극중에서 제가 병헌 오빠의 ‘누이’로 나와요. 연인이지만 나이가 몇 살 위인 누이. 결국 여성이 주도적인 역. 눈길이 갔죠. 무엇보다 너무도 얘기가 강렬했어요.”
강렬함은 지독스러울 정도로 ‘협녀’ 속에 차고 넘쳤다. 액션이 강렬했다. 무협이란 생경한 장르이기에 칼싸움은 필수적이다. 모조검이라고 해도 2~3kg의 무게다. 체력적인 부담이 말도 안될 정도였다. 더욱이 앞으로 보지 못하는 절대 고수다. 소리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눈은 뜨고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전도연의 몫이다.
“하하하. 이렇게 들으니깐 정말 끔찍한 과정을 겪어온 것 같네요(웃음). 힘들었죠. 정말 힘들었죠. 연습은 한 3개월 정도했나. 연습을 하고 좀 몸에 익은 순간부턴 영화 속 액션 시퀀스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자주 했었죠. 합이 너무 많은 액션들이라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가 나니까요. 그래도 참 몸에 안 붙더라구요(웃음). 제 첫 촬영이 뭔지 아세요. 영화 속에서 갈대밭의 50대 1로 싸우는 장면이었어요. 절대 고수의 범접할 수 없는 강인함을 보여줘야 하는 장면이라 욕심이 났죠. 근데 욕심이죠.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또 크고 작은 부상에. 어휴.”
가장 고통스러웠던 점은 시각장애인 연기다. 그가 연기한 극중 인물은 풍진삼협으로 불리는 협격 가운데 여성. 어떤 사건을 겪은 뒤 설랑에서 월소란 이름을 바뀌어 살아간다. 이름이 바뀌면서 시력을 잃었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줄 전도연은 살면서 처음 느껴봤단다. 연기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사실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그냥 참고 하거나, 이를 악물고 하면 되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본능적인 부분은 내가 콘트롤을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시력이거든요. 시각장애 연기는 방법도 답도 없어요. 우선 감독님에게 처음 들었어요. 앞으로 못보는 분들은 시각 세포가 죽어서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고. 전 눈은 뜨고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 월소잖아요. 그런데 사실 전 보이는 거잖아요(웃음). 난 잘했가고 생각하고 모니터를 보면 눈동자가 움직이는 게 보여요. 나도 모르게 몸이 반응을 하는 거죠. 진짜 죽겠더라구요. 하하하.”
액션도 시각장애 연기도 만만치 않았다. 칸의 여왕도 고개를 도리질 할 정도로 ‘협녀’는 그 자체가 무협이었다. 하지만 ‘협녀’의 진짜는 지독스러울 정도의 감정 연기다. 전도연이라면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필모그래피를 보자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협녀’ 속 전도연이 연기한 ‘설랑-월소’의 감정은 지금까지 그 어떤 전도연의 배역보다 진폭이 큰 역할이었다.
“배려가 가장 컸던 부분이고, 또 그래야 했던 연기였어요. 나와 병헌 오빠, 나와 고은이 모두. 나도 그랬고 병헌 오빠도 그랬고, 서로에게서 감정이 잡히고 또 나올때까지 많이 기다려줬어요. 워낙 오랫동안 잘 알아왔던 사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서로 아는 거죠. 반면 고은이는 날이 많이 서 있어야 했기에 좀 예민한 순간도 많았죠. 그래서 고은에게도 기다려 주는 게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기다림과 집중이 해답?(웃음)”
유독 이번 현장에서 전도연은 김고은을 예뻐했다. 극중 사제지간이상의 감정을 공유하는 관계이기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특히 최근 충무로 20대 여배우 가운데 최고의 핫스타로 떠오른 김고은과 ‘퀸’을 넘어 ‘여제’로 불리는 전도연의 만남은 촬영이 있던 아니면 사석에서든 시너지의 폭발을 예감케 하는 비주얼이다.
“요즘 친구들보면 참 대단해요. 전 그 나이 때 절대 그러지 않았고, 또 못했죠. 고은이는 그 또래 친구들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쉽지 않은 배역이고 작품이지만 하고자 했으면 뒤를 안봐요. 후회가 안남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 참 예뻐요. 그런데 배려도 참 많아요. 어린 친구가. 이번 영화에서도 사실은 ‘홍이’가 돋보여야 하는 스토리에요. 고은이는 충분히 이기적이고 욕심을 내도 뭐랄 사람 없는데 조화를 생각하는 것 같더라구요. 저런 친구 진짜 없어요.”
최근 들어 강렬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스토리가 부족하다’ ‘기획성이 떨어진다’ ‘여성 영화는 흥행이 안된다’는 충무로 속설은 이제 옛말이다. 여배우의 꼭지점에 선 선배로서 전도연은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했다.
“다 잘돼야 해요. 정말로요. 사실 예전에는 저 영화는 잘되고 우리는 좀 안되면 배 아팠죠. 배 아파요. 하지만 요즘은 우리가 안 되고 저 쪽이 잘돼도 기분이 좋아요. 어떤 식으로든 다 잘돼야 순환이 돼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해요. 다 잘되면 좋겠지만 어느 한 쪽만 잘된다면 그것조차도 조금씩 외연이 넓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이 주인공이 액션 영화, 한국형 무협도 분명 계속 나올 것이라 생각해요.”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cine517@newsway.co.kr
저작권자 © 온라인 경제미디어 뉴스웨이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