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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영욕의 44년’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YS, ‘영욕의 44년’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등록 2015.11.22 05:01

수정 2015.11.22 05:08

이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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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 맞서 민주화 투쟁···‘맷집’ 갖춘 승부사‘개혁은 성공, 경제는 실패’ 功過 엇갈린 임기 5년DJ 이어 6년만에 역사속으로···종언 고한 ‘양김시대’

사진=연합뉴스 제공사진=연합뉴스 제공


대한민국 제 14대 대통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향년 88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1954년 정계 입문에서부터 1998년 대통령 퇴임까지 44년 동안 군사정권 시대를 종식하고 개혁을 실천한 공(功)과 국가 파산위기를 초래한 과(過)가 공존하는 20세기말 한국 정치의 상징적 인물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통령이 꿈이었던 시골소년, 민주화 투사에서 대통령으로= 1927년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의 시골 마을인 대계마을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장택상 국회부의장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만 25세의 나이로 고향 거제에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이후 5·6·7·8·9·10·13·14대까지 총 9선에 성공한 그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함께 역대 최다선으로 이름을 올렸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초반기는 군사정권에 대한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는 3선 개헌에 항의해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63년에는 군정연장 반대집회·가두시위로 서대문 형무소에 23일간 수감되는 고초를 겪었다.

또한 신민당 원내총무 시절에는 박정희 대통령 3선개헌 반대투쟁을 주도하다 초산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72년 유신 선포에 미국에서 급거 귀국했다 가택연금을 당한 뒤 반 유신투쟁을 전개했으며, 신민당사 농성 때 경찰에 강제 연행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하는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6월 민주시민항쟁을 이끌며 본격적으로 대권 가도에 발을 들여놨다.

그는 제 13대 대선에 출마해 낙선했으나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간 ‘3당 합당’을 통해 14대 대선에서 승리, 대통령 취임과 함께 문민정부의 시대를 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통령이 꿈이라던 어촌 출신 소년이 의회 입성 38년만에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개혁부터 비리까지···문민정부의 ‘빛과 그림자’=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기대 속에 김 전 대통령은 임기 초반 90%에 달하는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자신의 구상을 실현해 나갔다.

군사정권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면서 개혁을 주도해 큰 호응을 얻었고, 부정부패와 12·12 쿠데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 수사해 징벌하기도 했다.

‘역사 바로세우기’를 기치로 전국에 박힌 쇠말뚝 제거 및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국민학교 명칭 초등학교 전환 등 일제의 흔적을 없애는 일에도 앞장섰다.

임기 2년차인 1993년에는 ‘긴급 재정경제 명령 제16호’를 발동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도입하고 공직자 재산 공개를 의무화한 것은 아직도 ‘YS표’ 개혁 드라이브의 상징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 같은 업적의 이면에는 독단적인 제왕적 리더십으로 인한 폐해와 정권 말기 부패·비리 사건, 경제정책 실패 등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97년 한보사태와 함께 차남 현철 씨가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면서 국민적 지지가 비판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인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되는 등 국가 파산의 위기가 도래하면서 정권교체의 빌미를 허용하게 된다. 단기 투기자본에 대응할 체력이 길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외환시장을 개방한 정부의 실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가스 폭발 사고 등 후진국형 참사가 잇따르면서 이를 예방하지 못했다는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양김 시대’= 지난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6년 만에 김 전 대통령까지 서거하면서 한국 정치사의 두 거목이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YS와 DJ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부터 협력과 경쟁을 반복하며 굴곡진 역사를 만들어왔다. 군사정권 하에서 정치적 시련을 함께 극복하는 ‘동지’로, 87년 대선을 앞두고는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대립하는 ‘적수’로 입장을 달리했다.

결정적으로 1990년 3당 합당 이후 2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 사람은 치열한 공방을 주고 받았고, DJ 서거 직전인 지난 2009년 8월 YS가 병문안을 가면서 극적인 화해를 이뤘다.

이들은 정치사의 거목이자 ‘보스 정치’의 대표 주자였던 만큼 각각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라는 지역 이름이 붙은 거대 계파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배출된 인사들은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정치 무대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이들 계파의 명맥이 사실상 끊긴 데다 두 전직 대통령이 모두 유명을 달리함에 따라 ‘양김 시대’는 공히 종언을 고하게 됐다.

이창희 기자 allnew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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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이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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