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계춘할망' 주연배우 윤여정“나는 여배우 아닌 노배우”
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윤여정.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강산이 5번 변할 동안 여배우로 살았다. 아니 버텼다는 표현이 적당할 듯하다.
영화 ‘계춘할망’(감독 창) 개봉을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를 위해 만난 윤여정은 강렬했다. 마르고 외소한 윤여정이었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맞는 것은 분위기에 개의치 않고 맞다 말하는 윤여정이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 ‘계춘할망’ 윤여정, 할머니 변신
윤여정은 영화 ‘계춘할망’에서 손녀 바보 계춘으로 분했다. 영화는 12년의 과거를 숨긴 채 집으로 돌아온 수상한 손녀 혜지(김고은 분)와 계춘의 이야기를 그린 가족 드라마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처음에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독립영화인 줄 알았어요. 누군가 순수한 마음으로 쓴 것 같았죠. ‘이걸 누가 투자해요’라고 물었더니 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것도 제 편견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죠. 저는 도회적인 이미지의 역할이 많이 들어오기에 ‘왜 나를 섭외하려고 하냐’고 물었더니 도회적인 이미지가 이미 소진되었다고 하더라고요. 허허, 재미있는 청년이구나 생각했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설득되고 말았네요.”
윤여정은 재치있게 ‘계춘할망’을 처음 만나던 순간을 회상했다. 영화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뼈대를 이룬다. 영화를 보는 내내 힐링(치유)되는 듯한 느낌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는 ‘계춘할망’의 큰 매력이다. 그렇다면 주연배우 윤여정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녀가 어떻게 계춘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할머니 계춘이 손녀를 포용하는 면이 좋았지요. 엔딩 부분을 잘 처리했다고 느껴요. 드라마틱하고 자극적인 작품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쓴 감독의 순수함이 와닿았어요. 따뜻한 정서도 좋았죠.”
‘계춘할망’은 할리우드 대작과 국내 대형 영화들과 경쟁이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윤여정은 영화의 따뜻한 정서를 앞세운 진심이 관객에게 닿을 것이라 자신했다. 대작들과의 경쟁이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물었다.
“‘계춘할망’ 시나리오가 제 마음을 움직였으니 관객들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요. 관객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죠. 자극적이고 피 튀기는 영화는 싫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요. 평온한 영화가 좋지요. 아름다운 이야기요. 산 세월이 끔찍했기에 영화를 통해 아름답고 예쁜 이야기를 보고 싶은가봐요.(웃음) 손수건 한 장 가지고 ‘계춘할망’ 보러 오시면 좋을 것 같네요.”
◆ 윤여정, 영화의 따뜻한 정서에 설득
자극적인 시나리오가 범람하는 충무로에서 따뜻하고 순수함이 담긴 ‘계춘할망’은 윤여정을 움직었다. 누군가의 진심이 50년차 배우를 움직였을 터. 따뜻한 영화와는 달리 촬영장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고. 촬영 당시를 묻자 윤여정의 표정이 달라졌다.
“촬영장이요? 아주 살벌했어요. 아역배우부터 시작해서 연출부, 제작부, 배우 등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작업이잖아요. 제가 고참이었죠. 아이고. 드라마는 속전속결로 찍고 헤어지잖아요. 하지만 영화는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바라보고 일하는 현장이에요. 영화는 종합예술이죠. 배경과 성격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만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에요. 아무래도 큰 선배, 어른으로 이런저런 훈수를 둘 수 밖에 없었죠. 엔딩에 스크롤 올라갈 때 고마운 사람들에 내 이름을 넣어달라고 이야기 했는데 넣어줬는지 모르겠어요.(웃음)”
윤여정은 촬영 당시를 회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매 장면, 매일 최선을 다했다. 자신을 ‘훈수 두는 어른’이라 칭했지만 그녀의 말 속에는 영화에 대한 애정이 읽혔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귀가 찢어지는 경미한 부상도 입었다. 또 장어에 물리는 아찔한 사고를 겪기도 했다.
“매일 매일이 사투였어요. 하루는 해녀복을 입다가 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어요. 알고보니 해녀복은 해녀끼리 서로 입혀주고 벗겨주는 것이더군요. 혼자 입지 못하는 것이었어요. 촬영 중에 제가 고생을 하니까 빨리 숨을 쉬게 하려고 스태프가 저를 벗겨주려고 돕는 과정에서 귀가 찢어졌어요. 또 하루는 장어를 잡다가 사타구니를 물렸지 뭐에요.”
윤여정은 찢어지고 물려가며 계춘이 되었다. 그 뿐이랴, 그녀는 제주도에서 평생을 보낸 할머니 계춘으로 변신하기 위해 거무튀튀한 분장을 얼굴에 해야 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 윤여정은 당시를 회상하며 다시 한 번 깊은 숨을 내쉬었다.
“피부가 지금도 빨갛지 않나요? 머리카락도 옥수수 수염이 되었지요.(웃음) 제주도 촬영을 끝내고 피부과에 갔더니 진정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후유증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영화 ‘은교’(2012) 때 박해일은 어떻게 노역 분장을 소화했을까 문득 궁금해서 문자를 보냈더니 ‘배우들의 열정은 대체불가한 것’이라는 답장이 왔어요. 해일이도 고생했겠다 싶었죠.”
윤여정은 ‘계춘할망’을 통해 증조할머니를 떠올렸다고. 영화 속 계춘이 손녀 해지를 향해 베푼 무한한 사랑은 실제 윤여정이 조부모를 통해 받은 사랑이 있었기에 표현이 가능한 연기였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은 대상이 있느냐는 질문에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자신의 조부모 이야기를 꺼냈다.
“증조할머니요. 그 때는 그걸 몰랐어요. 50살이 넘어서야 깨달았죠. 돌아가신지 한참 뒤에야 알게 된 거에요. 제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음식을 본인이 씹어서 제게 먹여주셨던 모습이죠. 당시에는 비위생적인 것 같아서 할머니가 싫었어요. 문득 할머니가 얼마나 슬펐을까 헤아릴 수도 없더라고요. ‘계춘할망’을 증조할머니께 바치고 싶어요.”
◆ 여배우에서 노배우로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누나'(2014), 드라마 '참 좋은 시절',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와 '계춘할망'. 또 개봉 시기를 조율 중인 '죽여주는 여자‘까지 윤여정은 열심히 일했다. 1년 동안 쉴 틈 없이 연기했다.
“일을 하며 문득 ‘69살에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웃음) 타이밍이 그렇게 된거죠. 쉬지않고 일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제 나이쯤 되면 실패도 해본 터라 계획대로 인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계획을 갖지 않죠. 일이 오면 순서대로 할 뿐이에요. ‘죽여주는 여자’ 촬영을 하면서는 이렇게 살다가는 인생도 있구나 싶었어요. 역할에 제법 빠져들었어요. 감정적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윤여정은 인터뷰 내내 자신을 노배우라 칭했다. 여배우는 늙어 죽을 때까지 여배우라 하지 않던가. 심지어 세상에는 여자, 남자 그리고 여배우가 있다는 유명한 말도 있다. 그만큼 여배우라는 존재는 존재감이 확실하다. 그런데 연거푸 자신을 노배우라 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칠십이면 노배우죠. (웃음) 여배우는 거북하고요. 젊고 화려한 후배들한테 붙여야 하는 것 같아요. 노배우로 잘 살았죠. 잘 살았다는 것은 잘났다는게 아니라 감사하게 내 일을 했다는 것이지요. 노배우는 명예나 돈을 쫓을 일도 없는거에요. 마음에 드는 감독, 작가가 있으면 그들의 작품을 하는 것이고요. 아등바등 계획해서 뭔가를 해서 뭔가를 얻겠다는 흑심은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윤여정은 대중의 잣대와 소신에 대해 밝혔다. 영화를 통해 어떤 평가를 받고 싶냐는 질문에 윤여정은 모든 평가는 관객들의 몫이라고 말하면서도 대중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제 길을 걷겠다는 소신을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누군가는 영화 속 제 모습, 혹은 예능, 드라마 속 제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걸 가지고 인간 윤여정을 평가하지는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계춘할망’ 속 계춘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배우로서 계춘을 통해 내리는 평가는 달게 받아야지요. 그러나 과거 예능 속 모습이나 윤여정의 사적인 부분으로 평가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생 끝자락에서 마주한 ‘계춘할망’이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저도 궁금해지네요.”
이이슬 기자 ssmoly6@
뉴스웨이 이이슬 기자
ssmoly6@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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