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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명예회장 故박용곤은···OB맥주 팔고 그룹 체질개선 이끌어

두산 명예회장 故박용곤은···OB맥주 팔고 그룹 체질개선 이끌어

등록 2019.03.04 16:08

김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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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재 없애고 중공업 중심 사업 재편 연봉제·토요 격주휴무 등 국내 최초 도입하고직원들 유럽배낭여행 보내는 등 배려의 리더십 펼쳐

1996년 8월 두산그룹 창업 100주년 축하 리셉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고인의 모습. 사진=두산그룹 제공.1996년 8월 두산그룹 창업 100주년 축하 리셉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고인의 모습. 사진=두산그룹 제공.

지난 3일 저녁 숙환으로 별세한 고(故)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1981년부터 두산 회장을 맡아 인재 중심의 경영으로 오늘날 ‘글로벌 두산’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32년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유족으로는 아들 정원(두산그룹 회장), 지원(두산중공업 회장), 딸 혜원(두산매거진 부회장) 씨 등 2남1녀를 뒀다.

두산그룹 회장 재임 시절 그는 국내 기업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 경영시스템을 도입한 경영인이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고, 1996년에는 토요 격주휴무 제도를 시작했다. 또 여름휴가와 별도의 유급 휴가제를 도입해 직원들의 직장생활 만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고인이 1998년 OB맥주를 외국기업에 매각을 추진하며 기업 체질을 바꿔나가던 당시 재계에선 너무 무모한 도전이 아니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았다. 그룹의 대표 사업을 통으로 잘라내는 등 소비재를 과감히 없애고 중공업 중심으로 사업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당시 경영위기 타개를 위해 주력이던 식음료 비중을 낮추면서 유사업종을 통폐합하는 조치를 단행해 33개에 이르던 계열사 수를 20개 사로 재편했다. 이런 선제 조치에 힘입어 두산은 2000년대 들어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미국 밥캣 등을 인수하면서 소비재 기업을 넘어 산업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OB맥주를 매각할 무렵 두산그룹의 연간 매출은 3조원 수준이었으나 두산중공업 성장과 함께 회사가 정점을 찍었던 2011년에 그룹 총 매출은 24조원 규모로 늘었다. 현재 두산인프라코어, 두산밥캣 등 중공업 사업 부문이 전체 그룹 매출의 약 70%에 달한다.

두산 관계자는 “OB맥주를 매각한 이후 중공업 중심으로 그룹 체질을 개선한 이후 10년 이상 성장세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이렇게 고인은 새로운 시도와 부단한 혁신을 통해 두산의 100년 전통을 이어갔고 두산의 새로운 100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3일 저녁 노환으로 별세했다. 사진 그래픽=강기영 기자.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3일 저녁 노환으로 별세했다. 사진 그래픽=강기영 기자.

앞서 동양맥주에 재직 중이던 1964년에는 당시 국내 기업에서는 생소하던 ‘조사과’라는 참모 조직을 신설해 회사 전반에 걸친 전략 수립, 예산 편성, 조사 업무 등을 수행하며 현대적 경영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고인은 그룹회장을 맡은 이후 1985년 동아출판사와 백화양조, 베리나인 등의 회사를 인수하며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90년대에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두산창업투자, 두산기술원, 두산렌탈, 두산정보통신 등의 회사를 잇달아 세웠다. 국제상업회의소 한국위원회 의장,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경영 성과를 인정받아 1984년 은탑산업훈장, 1987년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두산그룹에 따르면 두산 출신의 한 원로 경영인은 “바꾸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새로운 경영기법이나 제도가 등장하면 남들보다 먼저 해보자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재계에서 모든 사람이 인정할 정도로 과묵한 성품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업적 결단의 순간 때도 그는 실무진의 의견을 먼저 경청했고 다 듣고 나서야 입을 열어 방향을 정하는 성격이었다.

운전기사가 아파서 결근을 했던 날엔 박 명예회장이 직접 차를 몰고 회사로 출근했을 정도로 주변 사람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 운전기사는 선대 때부터 일을 한 사람으로 박 명예회장과도 40여 년을 함께했다.

고인은 야구에 대한 각별한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때 가장 먼저 야구단(OB베어스)을 창단했다. 어린이 회원 모집을 가장 먼저 시작했으며 2군을 제일 먼저 창단했다. 거동이 불편해진 뒤에도 휠체어를 타고 두산베어스 전지훈련장을 찾아 선수들 손을 일일이 맞잡았고 이전 시즌 기록을 줄줄이 외우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2008년 4월 17일 77세 희수연 때 자녀들로부터 등번호 77번이 찍힌 두산베어스 유니폼을 받아 든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을 지었다고 두산 측은 밝혔다.

뉴스웨이 김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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