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금서 ‘수조원’ ‘수천억’ 입장 차이수주금액·연구개발·미래가치 셈법 난항물밑 협상서 ‘합의 공감’ 외엔 먼 산만
양쪽 모두 합의로 매듭짓는 것이 긍정적이란 점엔 공감하지만 정작 어느 정도가 합리적인 수준의 금액이냐를 두고 셈법이 다르다는 관측이 흘러나온다.
지난 2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63-3부(재판장 이진화)가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을 상대로 제기한 ‘특허침해 관련 소 취하 및 손해배상 소송’의 1심 선고공판에서 원고 패소를 판결하면서 이런 분석이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이 판결 직후 양쪽 모두 입장문을 냈다.
법원이 손들어 준 LG화학은 “소송 관련 합의는 가능하나 객관적인 근거를 토대로 주주와 투자자가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수준이 제시돼야 한다”며 “SK이노베이션이 진정성 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면 ITC(미국국제위원회)와 미국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 민사소송 등 배터리 핵심 기술 보호를 위한 법적 절차를 끝까지 성실하게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법원 판결과 별개로 미국에서 검토 중인 가장 중요한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이다.
LG화학은 지난해 4월과 9월 각각 ITC와 델라웨어주 연방지법에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배터리 영업비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SK이노베이션은 국내에서 LG화학을 상대로 “LG화학이 2014년 국내외에서 10년간 쟁송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를 어겼다”며 이날 판결 나온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패한 것이다.
곧바로 SK이노베이션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응수했다. SK이노베이션은 “패소 판결에 깊은 유감을 표하고 판결 이유를 분석해 상급심에 항소할 것”이라고 맞섰다.
다만 SK이노베이션은 “이와는 별개로 배터리 산업과 양사의 발전을 위해 협력해 나갈 것을 희망한다”며 향후 LG화학과 원만한 합의 가능성은 열어뒀다.
관련 업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국내외 소송전 중 가장 처음 나온 판결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핵심 소송전에서 ITC의 판단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특히 더 중요한 것은 이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두 회사가 합의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ITC의 최종 판결은 오는 10월5일 예정돼있다. 앞서 ITC는 지난 2월 SK이노베이션의 조기 패소 판결을 내렸다. SK이노베이션이 증거보존의무가 있는데도 관련 문서를 삭제하거나 LG화학에 자료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했다.
특히 ITC는 어떤 영업 비밀을 SK이노베이션이 어떻게 사용해 소재·부품·셀·모듈 등을 만들었는지 구체적 리스트를 갖고 있고 이를 인정했기 때문에 조기 패소 결정을 내린 것으로 파악됐다.
SK이노베이션이 영업 비밀 침해 내용을 구체적으로 못 밝히면서 과도한 합의금을 요구한다고 주장하지만 ITC 조기패소 판결문을 살펴보면 구체적인 영업비밀 침해 사례가 상세히 나온다.
1996년부터 지난해까지 통계를 봤을 때 ITC가 예비결정을 뒤집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도 결국은 SK이노베이션이 일정 수준 합의금을 LG화학에 건네는 것이 양쪽 모두 이익이라는 주장도 고개를 들었다.
문제는 양쪽 모두 비밀유지를 전제로 물밑 협상을 벌였지만 합의금 산정에 난항을 겪는다는 점이다.
재계 관계자는 “합의금을 두고 SK이노베이션은 수천억원대 금액을 추정하고 있는데 LG화학은 수조원대를 논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기본적으로 SK이노베이션의 영업 침해가 있었다면 그것으로 SK이노베이션이 어떤 이득을 어떻게 얻었는지 산정하는 것부터 평행선을 보이고 있다”고 귀띔했다.
사실상 합의하는 것이 전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경쟁하는 한국 기업의 ‘국익’을 위해서 좋다는 일차적인 목표에만 공감한 것일 뿐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손해배상 산정을 위해선 영업 비밀을 활용한 수주 금액을 산정하고 연구개발(R&D) 비용 등의 부당 이득을 따진 뒤에 미래 가치까지 계산한다. 그런데 기술 탈취 여부를 차치하고서도 이런 세부 사항에서 ‘수천억’에서 ‘수조원’까지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LG화학 입장에선 고 구몬부 LG그룹 회장 시절부터 20년 넘게 투자한 배터리가 그룹 차원의 차세대 먹거리로 떠오르고 마침 글로벌 1위까지 올랐으니 쉽게 물러설 리 없다. 게다가 그룹 차원에서 “지킬 것은 지키겠다”라는 기조가 강해 각 계열사 역시 과거와 달라진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반대로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후발 주자로써 과감하게 미국 조지아주 공장 투자에 3조원을 투자하는데 LG화학에 ‘수조원대’ 금액을 배상할 경우 투자금 못지않거나 자칫 그 이상을 경쟁사에 내줘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다.
그마저도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영업비밀을 탈취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해당 영업 비밀을 활용한 적이 없었다고 반박하고 있어 양쪽의 물밑 협상은 더욱 골이 깊을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양쪽 모두 그룹 차원의 총수나 최고경영진이 머리를 맞댈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이미 신학철 부회장(LG화학)과 김준 총괄사장(SK이노베이션)이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서지 않았느냐”면서 “그룹 차원의 대화를 하기 전까지 협상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9월 두 CEO는 소송전 이후 처음으로 만났지만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유의미한 대화를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웨이 임정혁 기자
dori@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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