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준다니. 언제 빼앗기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실제로 당선인이 어떤 국민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는지 알 길은 없으나, 개인적으로 그런 시선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새로울 따름이다.
산업은행엔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소식이었을 듯 싶다. 대통령 집무실에 수십년간 쌓여온 국가 안보 시스템까지 속전속결로 바꿔버리려는 다음 행정부에 국책은행 지방이전은 고민거리도 아닐 테니 말이다.
당선인은 선거 과정에서 부산에 산업은행 본점을 두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지난 16일엔 박형준 부산시장과 만나 이를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다보니 은행 임직원의 근심이 깊어지고 있다. 당선인의 강경한 태도에 꼼짝없이 짐을 싸야 할 판이 돼서다.
사실 산업은행 이전은 여러 정부에 걸쳐 논의된 사안이다. 2004년 참여정부가 국가균형발전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처음으로 산업은행 본점의 이동을 검토했고, 이번 정부에 접어들어서도 자신의 지역구에 이를 유치하려는 국회의원의 잇따른 법안 발의에 수차례 화두로 떠오른 바 있다.
한국산업은행법 4조 1항엔 '한국산업은행은 본점을 서울특별시에 둔다'고 명시됐다. 이 조항부터 수정해야 산업은행이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다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은 몇 글자만 고치면 간단히 끝날 것처럼 보이는 문제가 20년 가까이 공회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잡하지만 풀어보면 배경은 단순하다. 굳이 지방으로 옮길 필요가 없어서다. 누구도 국가균형발전이란 명분 이외의 당위성을 찾지 못했고 효과도 검증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소비자에게는 익숙하지 않겠지만, 산업은행은 국내 최대 정책금융기관으로서 광범위한 임무를 지녔다. 기업에 자금을 빌려주는 데서 나아가 혁신생태계 조성과 글로벌 사업, 통일금융 등 다방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등 기업 구조조정은 물론 유망 벤처기업을 육성하거나 국제금융기구와 소통해 우리 기업의 해외 SOC(사회간접자본) 사업 유치를 돕는 것도 산업은행의 일이다. 코로나19 대확산의 긴급한 상황 속에선 저금리 대출과 저신용 회사채 매입으로 국가 기간산업의 안전판 역할을 했다.
산업은행은 시장형 정책금융기관의 성격도 띠고 있다. 외국계 투자자와 시중은행, 보험사, 증권사 등 시장 참여자를 통해 자금을 공급 중이다. 2020년 기준 산업은행이 산업금융채권과 외화차입으로 조달한 금액은 137조원에 이른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산업은행이 서울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결론이다. 기업과의 협업이 요구되는데, 국내 상장사 2485개 중 72.3%가 본사를 수도권에 두고 있으니 사업에 유리하다는 진단에서다.
옮겨간 공공기관이 반드시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아니다. 직원이 가족과 함께 이동하지도 않을뿐더러 기관별로 주요 업무를 여전히 서울에서 처리하고 있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한국거래소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등 29개 금융기관을 유치하고도 산업은행까지 품으려는 부산시의 행보가 이를 방증한다. 실제 부산시 금융업의 지역 내 총부가가치율은 지난 2018년 7.1%에서 2019년 6.9%로 감소했고, 국제금융센터지수(GFCI) 순위 역시 2015년 27위에서 지난해 33위로 후퇴했다.
이쯤해서 "은행의 지방 이전은 진보가 아닌 퇴보이며 금융발전에 역행하는 것"이란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의 발언을 다시 옮겨 적는다.
그럼에도 공약을 꼭 이행해야 하겠다면 당선인 측이 직접 이보다 나은 논리로 국민과 산업은행을 '설득'해야 할 것이다. 집권 초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 무리하게 밀어붙이거나 집무실 이동 건처럼 '일단 해보고'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정책금융 기관이다. 산업은행이 선거용으로 쉽게 주고받을 만한 규모는 아니지 않은가. 신중해야 한다.
덧붙여 산업은행 지방이전은 국회의 동의 없인 실현 불가능한 공약이란 점도 당선인 측이 잘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뉴스웨이 차재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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