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격변의 시대, '위성 샷'으로 본 한국경제 생존법

전문가 칼럼 류영재 류영재의 지속가능 경제

격변의 시대, '위성 샷'으로 본 한국경제 생존법

등록 2026.01.2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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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나 기업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시선, 즉 외부 관점이 필수적이다. 시장의 니즈와 트렌드를 정확히 읽고 대응해야만 경쟁력을 유지·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부 시각에 갇혀 집단사고(groupthink)나 확증편향에 빠지면, 결국 나르시시즘에 도취되어 조직의 경쟁력 상실은 물론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 국가는 더욱 그렇다. 지경학(geoeconomics)과 지정학(geopolitics)의 역학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냉엄한 국제 질서에서, 자국의 좌표를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이른바 '위성 샷(satellite shot)'식 외부 점검 전략은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에 가깝다.

조선시대, 특히 중기 이후 우리는 이러한 '위성 샷' 관점의 진단과 대응에 실패했다. 세도정치가 만연한 상황에서 사대부 집단은 호가호위하며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고담준론에 취해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열강의 세력 확장이 본격화되고, 중국·일본이 잇따라 불평등조약을 맺으며 개혁·개방을 서두르던 시기에도 조선의 집권층, 특히 왕실 척신(戚臣)들은 세계 정세의 격변을 외면한 채 매관매직과 삼정의 문란 등 가렴주구에 몰두해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쇠락해 가는 청에 의존한 극단적 쇄국정책 속에서 세계사적 변화에 대한 인식은 부재에 가까웠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며 힘을 얻은 위정척사파는 스승 이항로의 사상에 매몰된 채 서구 문명을 극단적으로 배척했다. 그는 문집에서 서양인을 '수국(水國)의 인갑(鱗甲)', 즉 물속에 사는 조개류 같은 종족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오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무지몽매한 인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식과 쇄국 기조가 중첩되면서 조선은 개방과 산업화의 파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 후과는 일제 식민지로의 전락이었다.

조선 말의 실패를 복기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분명한 함의를 지닌다. 냉전 종식 이후 약 30여 년간 유지되어 온 지경학적 질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구조적 변곡점을 맞았다. 금융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중국은 여러 갈등 사안에도 불구하고 '달러 리사이클링'이라는 메커니즘 아래 긴밀한 공생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은 저임금 제조업을 기반으로 '세계의 공장' 역할을 수행했고, 그렇게 벌어들인 막대한 달러로 미국 국채를 매입했다. 그 결과 미국은 중국산 저가 상품 덕분에 낮은 물가와 금리, 안정적 성장을 누리는 '골디락스(Goldilocks)'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 관계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미국 연준은 양적완화라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대규모로 시행했고, 그 과정에서 중국을 포함해 미국 국채를 다량 보유한 국가들의 실질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부각되었다. 미국의 금융패권이 유사시 경쟁국에 미칠 수 있는 파급력을 중국이 체감한 계기이기도 했다. 이후 중국은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미국 국채 매입보다 내수 시장 확대와 위안화 국제화 등 전략적 프로젝트에 더 많이 투입하기 시작했다. 2012년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내세우며 일대일로, AIIB 설립, '중국제조 2025' 등 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를 가동한 것도 이러한 방향 전환의 연장선이었다. 이제 미·중 관계는 장기간의 관리된 공생 단계에서 전략적 경쟁, 나아가 적대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2011년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 국무장관은 『Foreign Policy』 기고문 "America's Pacific Century"에서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을 천명하며 외교·군사·경제 분야에서의 다각적 재배치를 제시했다. 같은 해 1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호주 의회 연설에서 "21세기의 지정학은 아시아·태평양에서 결정될 것이며 미국은 반드시 그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 견제 의도가 강하게 드러났지만, 보다 구조적인 이유도 있다. 바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가치가 중동보다 커지는 방향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1970~80년대 1·2차 오일쇼크 이후 중동은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지만, 쉐일 가스 혁명으로 에너지 자급도가 크게 높아진 미국에게 중동의 전략적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대신 21세기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반도체의 핵심 생산기지인 한국·대만·일본, 그리고 급부상하는 중국을 포괄하는 동아시아가 새로운 전략 중심축으로 부상했다.

특히 한국과 대만은 글로벌 프로세서 칩 생산의 약 83퍼센트, 메모리 칩 생산의 약 70퍼센트를 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치는 시점과 통계 작성 기관에 따라 변동이 있지만, 두 나라가 첨단 반도체 공급망의 중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에 일본의 장비·소재 경쟁력과 중국의 대규모 내수·제조 기반까지 더하면 동아시아는 21세기판 '페르시아만'이라 불러도 과장이 아닐 만큼 지경학적 가치가 집중된 지역이 되었다. 미국의 국가 전략적 관심이 중동에서 동아시아로 이동한 배경이다.

다시 도래한 '트럼프 2.0' 시대는 이러한 흐름을 한층 거칠고 노골적인 경쟁의 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동맹 공조를 통해 중국을 정교하게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면,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기치로 동맹·비동맹을 가리지 않는 관세 압박과 재협상 공세를 펼치고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비판하며 "미국 내 생산·투자를 약속하지 않는 외국산 반도체에 대해 약 100% 수준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한국과 대만의 대체불가한 지경학적 가치가 언제든 미국 국익을 위한 경제적 인질로 활용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아울러 희토류 등 전략 자원과 북극권 패권 확보를 위해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의 '매입 또는 획득' 가능성을 재차 시사한 것 역시, 영토와 경제적 이익을 결합하려는 지경학적 야심을 가감 없이 드러낸 사례다. 자유무역 규범이 약화되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야생의 정글로 국제 질서가 회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제 총성 없는 전쟁의 막은 이미 올랐다. 트럼프 행정부의 무차별적 관세 압박과 노골적인 자국 우선주의, 그리고 이에 맞서는 중국의 기술굴기와 내수 중심 성장 전략 사이에서 한국은 생존을 위한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처지다. 더 이상 순진한 낙관에 기댄 안이한 대응이나 소모적 내부 정치 갈등으로 골든타임을 허비할 여유는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혹한 '위성 샷'의 시선으로 한국의 지정학·지경학적 좌표를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오직 국익을 기준으로 기민하게 움직이는 전략적 유연성이다. 100여 년 전 세계사의 거대한 물결을 읽지 못해 치른 참담한 대가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이어질 연재를 통해 격변의 파고 속에서 한국 경제가 지속 가능한 번영을 누리기 위한 냉철한 대안과 실질적 해법을 하나씩 제시하고자 한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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