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론 사례 들어 한국 기업에 동참 독려미국 공급망 재편 움직임에 국내 업계 긴장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향해 "미국 내 메모리 반도체 생산을 확대하라"고 공개적으로 촉구하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압박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을 향해 본격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9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러트닉 상무장관은 미국 뉴욕주 클레이 타운에서 열린 마이크론의 신규 반도체 공장 콘크리트 타설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공장을 짓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두 회사와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며 "마이크론이 앞서가고 있기 때문에 다른 회사들이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국 기업들의 추가적인 대미 투자를 공개적으로 독려했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이었던 마이크론은 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 공급망 내재화 기조에 부응해 2035년까지 미국 내 투자 규모를 기존 계획보다 증액한 2500억달러(약 375조원) 이상으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존 계획보다 500억달러 늘어난 규모다.
러트닉 장관은 이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은 사업을 영위해야 할 곳이 바로 미국임을 분명히 했다"며 "트럼프식 경제 모델은 미국 투자에 지금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라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러트닉 장관의 발언 타이밍이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SK하이닉스가 미국 주식예탁증서(ADR)를 나스닥에 상장하기 불과 하루 전에 나왔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가 미국 자본시장에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려는 시점에 맞춰, 돈은 미국에서 조달하면서 생산은 왜 미국에서 더 늘리지 않느냐는 무언의 압박을 보낸 셈이다.
또한, 이번 발언은 단순한 투자 권유를 넘어 핵심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압박의 시작으로 풀이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임기 말까지 전 세계 반도체의 40%를 미국 내에서 생산하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마이크론도 이에 부응해 D램의 40%를 미국 내에서 만든다고 화답하자, 이를 지렛대 삼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도 유사한 수준의 청구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러트닉 장관이 한국의 두 메모리 제조사와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위한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직접 언급한 점도 긴장감을 높인다. 비록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밝히지 않았으나, 물밑에서 이미 상당한 수준의 압박이나 협상이 오가고 있음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현재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을 완공 중이며,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첨단 패키징 공장 건설을 시작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미국에 약속한 시설은 주로 파운드리와 후공정 팹이며, 러트닉 장관이 요구한 것은 핵심 주력 상품인 '메모리 반도체(D램·낸드)' 생산 시설의 대대적인 미국 이전 혹은 확장이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 미국 내 메모리 공장 증설은 대단히 부담스러운 카드다. 미국은 한국에 비해 인건비, 전력 등 인프라 비용 및 공장 건설 비용이 압도적으로 높다. 게다가 이미 국내에 수백조 원을 투입해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등 서남권 거점을 조성하겠다는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상황에서, 미국의 요구대로 투자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분산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이전 바이든 정부 시절 약속된 '칩스법 보조금'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하거나 삭감 압박을 가할 가능성도 있다. 보조금 혜택은 줄이면서 대미 투자는 더 늘리라는 이중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안이 본격적인 한미 통상 마찰로 비화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뉴스웨이 이윤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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