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힘든 일을 배우 권현상은 해나가고 있다. 최근 인터뷰를 위해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뉴스웨이에서 권현상을 만났다. 얼굴이 좀 부었다며 머쓱해하던 그였지만, 브라운관 속 모습처럼 여전히 멋졌다. 인터뷰 동안 차분히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가 더 매력적이었다.
권현상은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욱씨남정기’에서 러블리 코스메틱 마케팅본부 대리 박현우 역을 맡았다. 극중 박현우는 학자금 대출 빚에 허덕이는 현실에 사랑까지 포기한다. 순간의 유혹에 흔들려 나쁜 마음도 먹을 때가 있었지만, 결국 소신을 지키는 올곧은 인물이다.
박현우는 그 누군가와 로맨스가 이뤄지지도 않고, 대단한 성공 스토리를 지니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묵묵히 현실을 그려내며 ‘욱씨남정기’가 공감 넘치는 드라마가 되는데 일조했다.
“회사생활을 해본 게 아니라서 저도 모르기 때문에 연기를 보는 사람들이 공감을 할까 싶었어요. 과장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방송 후에 주변에서 자기 일 같아서 공감이 가더라고 말해줬어요. 주변에 직장 다니는 친구들한테 물어보기도 했거든요. 대리는 무슨 일을 하며, 호칭은 어떻게 하고 출근해서 어떤 일을 하는 지까지.”
권현상은 자신이 연기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던 장면도 있지만, 연기를 하면서 오히려 그런 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었고 아닌 부분도 있었어요. 극중 황보라가 성추행 당하는 걸 보고도 회사 눈치에 눈감아주는 장면은 어느 정도 공감이 갔어요. 직장인이면 저렇게 고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 기밀을 빼내는 부분에서는, 만약 저였다면 애초에 훔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오히려 이직을 알아봤을 거에요.”
권현상은 회사의 유혹도 협박도 받으며 눈물을 머금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본인을 “현실주의자”라고 칭한 것처럼, 실제 모습도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더욱 캐릭터에 잘 녹아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 보니 코믹 요소가 군데 군데 묻어나는 ‘욱씨남정기’에서 박현우 캐릭터는 어딘지 모르게 시종일관 어둡다. 물론 함께 웃고 떠드는 장면 등도 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8회가 넘어가면서부터 캐릭터 분위기가 엄청 다운됐어요. 웃을 일이 없어요. 상사한테 구박받고 사랑도 잘 안되고. 현실에 찌들어 혼자 고민하고 우울해 하죠. 코믹적인 요소가 들어가는 드라마인데 나는 리액션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가장 현실적인 인물을 연기하기에 신경 쓸 부분도 많았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마음 놓고 웃지도 못 하며 밝은 표정을 짓는 장면도 몇 컷 없다. 이런 연기를 권현상은 해냈다. 철저한 캐릭터 분석, 감독과 동료 배우들의 조언 흡수, 자신만의 것으로 승화 이 삼박자가 맞았기에 가능했다.
“시놉시스 설명 몇 줄과 1부 대본이 처음 나오는데, 주연이 아닌 인물은 캐릭터를 잡기가 애매해요. 대본이 한 번에 끝까지 나오는 게 아니니 어떻게 풀릴지 모르고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봐야 해요. 그래서 촬영 초반에는 부담스럽다고 해야 하나, 캐릭터가 완전히 자리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가니까요.”
극중 황보라와 관계도 당초 사내커플이라고 들었는데 대본상에는 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없어 애매했다고. 러브라인이 이어지지 않을 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권현상은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만의 박현우를 만들어냈고 드라마를 채웠다. 감독도 권현상이 자유롭게 연기해볼 수 있도록 믿고 맡겼다.
“‘너만 끝까지 당하고 찌질하고 안 풀리고, 그렇게 끝나서 아쉽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오히려 연결 안 된 게 더 좋았어요. 현실적인 것 같아서요. 주연들도 좋은 분위기로 결말을 맞았고 열린 결말이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함께 작품을 한 배우들과 호흡도 좋고 분위기도 유쾌했던 점도 만족스러움에 한 몫 한다. ‘욱씨남정기’ 배우들과 메신저 단체방까지 있다고.
“윤상현 형은 항상 농담을 다고 다니세요. 분위기 메이킹하는데 일등공신인 것 같아요. 성격도 밝으시고 후배들에게 일부러 말도 걸며 잘 챙겨주세요. 유재명 선배도, 선영누나도, 요원누나도 다 좋아요. 저희 러블리 코스메틱끼리 모이면 웃음과 수다가 끊이지 않아서 감독님이 슛 좀 들어가자고 하실 정도였어요. (웃음)”
러블리 코스메틱 식구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한 배를 탔던 이들은 서로 각기 다른 현실을 연기하며 조화를 이뤄냈다. 워킹맘의 애달픈 현실을 연기한 김선영, 비정규직의 설움을 감내해야 했던 황보라 등 모두가 모여 작품의 현실감을 끌어올렸다.
‘욱씨남정기’는 현실 속 을이 갑이 되는 모습이 아닌, 을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덕분에 대사 하나하나 시청자들의 가슴에 박혔고, 수많은 공감을 샀다. 결말 역시 쌩뚱 맞은 로맨스 없이 끝까지 맥락을 잘 유지해 호평을 받았다.
“이렇게 명확한 드라마는 오랜만이었던 것 같아요. 방송 전 대본 보면서 재미있다고 느끼기는 좀힘들었는데, 이건 처음부터 재미있어요. 배우들끼리도 ‘생각지도 못한 대사들을 쓰신다’며 대본 칭찬을 했어요.”
캐릭터 한 명 한 명 살아있는 ‘욱씨남정기’, 그렇다면 그 중 권현상이 해보고 싶은 역할은 무엇일까?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신 팀장 해보고 싶어요. 못된 역할 좋아하거든요. 찌질하면서 못된. (웃음) 배우가 악역을 맡았을 때 표현할 수 있는 폭이 넓다고 생각해요. 실제 나는 그렇지 않은데 연기해볼 수도 있고 내 안의 작은 악마를 발견할 수도 있고, 다양하게 해볼 수 있어서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극중 안상우가 연기한 신팀장은 비정규직 직원에게 정규직 전환을 미끼로 성추행을 하고 이를 폭로한 후배들을 괴롭힌다. 안하무인에 공금횡령까지 하는 악역이다. 권현상에게 “로맨스를 해볼 생각은 없냐”고 묻자, 그는 잠시 고민했다.
“독립영화로 로맨스 찍었던 게 있긴 한데, 저는 주된 것을 벗어난 것에 호감이 가요. 약간 마이너, 음지 같은 쪽이 맞다고 해야 하나. (웃음) 못된 게 잘 맞는 것 같아요. ‘욱씨남정기’를 보고 착한 게 어울린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고 편한 건 나쁜 놈 연기에요.”
돌이켜 보면 2013년, 2012 드라마피버 올해 최고의 악역상을 수상하기까지 한 그다. 자신에게 잘 맞는 연기를 파악하고 이를 중심으로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권현상은 참 현명했다. 생각은 확고했으며 밀고 나가는 뚝심까지 있었다.
“출연분량 챙기자는 주의는 아니고 흐름에 방해가 안될 정도로만 나왔으면 하는 편이에요. 화면 어디 한 번 더 걸리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연기했을 때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있고, 다른 연기를 좋아해주실 때도 있고 다 보는 눈이 다르잖아요. 그런걸 보면 한결같이 똑같은 연기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돼요. 과장해야 할 때도 있고 현실적이어야 할 때도 있고. 이번 드라마 하면서 많이 느꼈어요.”
권현상은 연기를 하는데 있어 굉장히 조심스럽고 겸손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캐릭터와 작가가 생각한 모습과 다를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 작가에 물어보기까지 고민도 많이 했다고.
그래서 늘 쫑파티를 하면 부끄럽단다.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가 ‘이 캐릭터 더 잘 연기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란다. 자신의 철학을 세우되 귀와 마음은 열고 묵묵히 연기하는 권현상이 진짜 멋진 배우가 아닐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에게서 임팩트를 느낄 때가 있거든요. 저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다음에 무슨 작품 할 지 궁금해지는, 기대감을 줄 수 있는 배우가 될래요.”
이소희 기자 lshsh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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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이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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