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적의 시간'이 지나자 '응용'이 필요해졌다. 모방은 혁신이 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6년 KIST를 세웠다. 기업이 직접 개발하기 어려운 기술이 있을 때, 역시나 해외 유수 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KIST 연구원들과 현업의 담당자들이 함께 모여 개발을 도와 제품 개발과 양산에 기여했다. 1980년대 이후 기업들이 직접 중앙연구원을 세워 R&D를 주도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하고도 한참의 시간 동안 1986년 초고집적 반도체 공동 개발사업 같은 정부가 주도하는 연구과제 프로젝트는 기업들의 초기 기술혁신에 크게 기여했다. 2000년대를 지나며 국내 제조 대기업의 역량이 바야흐로 '글로벌 클래스'에 도달했을 때야, 정부의 역할이 보이지 않았다. 정부는 직접 기술 개발을 지도하는 역할에서 조금은 물러서 198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부를 설립하는 등 과학기술 인력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단계가 지나면서 정부의 역할은 조금씩 변했지만 변함없는 것은 1967년 과학기술처를 설립한 이래, 가능하다면 최대의 지원을 과학 기술 분야에 투자했다는 것이다. 생산 현장에서 '모방'만으로 산업 강국 대한민국의 장기적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당장 결과가 나오는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던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나 1990년대 정보통신산업 진흥 같은 산업정책이 이제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아 예전처럼 몇 개의 주력산업을 찍지는 않더라도,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개발을 진행할 수 있게 물심양면 도와야 한다는 정부의 방침이 변한 적은 없다.
그런데 요 몇 주 나타난 정부 R&D 예산 삭감, 출연연 예산 삭감은 과학기술정책, 산업정책이라는 측면에서 중대한 변화를 예감하게 된다. 삭감 폭은 16.6%P다. 정부가 R&D 예산을 줄인 것은 1991년 이래 최초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시에도 삭감되지 않았는데, 이번 예산안이 미칠 영향은 과연 과거 정부 정책 예산이었던 '소부장'이나 '친환경 재생에너지', 혹은 'COVID-19 관련 신약 분야 R&D' 분야의 다이어트로 그치게 될까? 못 먹던 시절에도 원조 예산으로 인재를 유학 보내고, 조금 더 잘살게 되자 아낌없이 과학기술에 투자했던 대한민국은 괜찮을까?
물론 그 영향은 당장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글로벌 제조 대기업들이야 당장 만들던 제품 만들면 되고, 다소 '방만해' 보이던 연구 예산은 삭감하면 그만이다. '첨단산업'에 대한 지원은 계속한다니 당장 몇 년 큰 문제야 있겠는가 싶다. 하지만 그 기틀을 만들어 내는 이학계열의 기초연구, 산업계의 '뿌리'가 되는 응용연구를 수행하던 '미래의 산업역군'이 될 과학기술 인력의 생태계는 어떻게 될까 걱정이다.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기업이 바라는 이공계 인력 역시 특화된 계약학과 출신보다 물리학과 수학에 밝고 기초가 튼튼한 연구자에 가깝다. 그러한 대학원생이거나 박사후연구원들이 수행하는 연구가 바로 학교와 출연연의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다.
이제는 기술을 베끼던 시절도 아니고, 생산공법만 개선하는 시절도 아니고,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혁신이 기존의 생산기술에 기반을 두었던 축적된 혁신과 만나 다음 단계 산업 전환을 만들어야 할 시기다. 기후변화가 제기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도, 훨씬 더 다양해진 소비자들의 니즈를 따르거나 니즈를 창출하기에도 과학기술계의 생태계가 두터워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금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조금 더 나은 예산과 정책 방향으로 개선되길 기대한다.
뉴스웨이 차재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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