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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창업자 혈통과 기업 거버넌스

전문가 칼럼 류영재 류영재의 ESG 전망대

창업자 혈통과 기업 거버넌스

등록 2024.06.24 10:36

수정 2024.06.24 10:58

창업자 혈통과 기업 거버넌스 기사의 사진

지배주주 없는 회사에서만 평생 일했고 임원과 대표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올해 초 지배주주가 있는 회사의 대표로 부임한 분을 최근 만났다. 회사 생활이 어떠냐고 물으니 '오너(지배주주)'에게 보고하고, 그로부터 지시받고 성과 내느라 무척 힘들고 따라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도 말했다. 과거 오너 없는 회사와는 완전 딴판이라고도 덧붙였다.

이 분과 만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불현듯 기업과 교회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오너 있는 기업과 창립자 목사가 있는 교회가 서로 닮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교회도 창립자 목사가 이끄는 교회들이 대개 타이트하게 돌아간다. 그 강력한 리더십 하에서 부목사들, 전도사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니 대개 그러한 교회들은 당대에 성장한다. 그들 중 일부는 대형 교회, 초대형교회가 되는 곳도 있다. 일사불란한 곳에서 성과가 나온다는 얘기다.

그러다 창립 목사가 은퇴하거나 사망하고, 이른바 월급쟁이 CEO처럼 오너십 없는 청빙 목사들이 부임하면 교회는 잦은 분란에 휩싸이거나 지리멸렬하는 경우가 많다. 장로들이나 유력 교인들이 자꾸 흔들기 때문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교회 운영에 대해 다들 한마디씩 하기 때문이다. 배는 산으로 간다. 이렇게 보면, 대개의 청빙 목사는 제도상 문서상의 권한만 창립자 목사와 동일할 뿐, 실제로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기업이든, 교회든 한국 사람들이 집단을 이룬 곳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이 현상을 충분히 이해해야, 조직 통치 원리이자 메커니즘인 '거버넌스' 문제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

문화 인류학자인 '페르낭 브로델'은 벼농사의 동아시아와 밀 농사의 서양을 비교 분석한 학자로 유명하다. 베스트셀러 '총 균 쇠'의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도 곡물의 생산과 진화가 인간 조직(국가) 및 기술 진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그보다 더 일찍이 에스터 보세럽(1965)과 카를 비트포겔(1957) 또한 생태적 환경과 인간 조직의 진화가 서로 얽히고설켜 있음을 설파했다. (이철승, '쌀 재난 국가' 참조)

이러한 곡물 생산 방식의 차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는 협업과 위계의 집단주의(Collectivism)가, 서양에서는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배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자에서는 일사불란한 집단 작업을 위해 위계적 질서가, 후자에서는 개인 간 계약적 질서가 중요한 사회 작동 원리로 발전해 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가부장적 위계 유전인자'를 품고 있다. '가부장(家父長)'과 위계성(位階性)은 봉건적 유교문화와 앞서 언급했듯 '밀 농사'와 대비되는 '벼농사 체제'에서 배태된 유산들이다. 여기서는 협업, 집단 작업을 이끄는 강력한 위계적 리더십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래야 조직이나 집단이 돌아가고 조직이 돌아가야 거기서 성과가 나올 수 있다.

이래서 한국에서는 오너라고 불리는 '패밀리 가문'이 무슨 필요악과도 같이 존재한다. 허접한 3세, 4세라도 창업자의 혈통을 갖고 태어나야 뭇사람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는다. 우리와 동일한 유전자를 갖는 북한에 사례가 있다. 즉 3세가 백두혈통이란 단 하나의 이유로 나라를 통째로 접수해도 십여 년째 멀쩡하게 유지된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한반도에서는 의사결정의 합리성보다는 혈통이라는 정통성을 가져야, 수많은 반론과 이견들을 단칼에 교통 정리하고, 옳든 그른 방향이든 결정해 진도를 나갈 수 있다. '경영은 제때 결정하는 것(decision-making)'이란 명제에서 보면 이러한 측면은 결코 간과돼서는 안 된다.

'전근대적 현대성', '현대와 전근대의 뒤섞임', 이것이 한국 사회와 한국 사람들을 웅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거버넌스 연구와 운동에서도 이러한 동서양의 문화 역사 규범적 차이, 인간 행동양식의 차별점을 서로 간의 열위나 선호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천착해야 한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 탈피를 위한 문화변혁과 계몽운동도 긴 호흡으로 함께 추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 개정, 배임죄 폐지, 상속세 완화 등 제도 개선의 틀에서만 이 문제를 풀고자 한다면, 대한민국 오너들에게 몸 바친 수많은 브레인들과 그 지원군들은 궤변과 요설로 대응할 것이다. 정책에는 대책으로 응수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금력과 로비력으로 법망을 빠져나갈 것이다. 과거 실패에서 레슨을 얻자. 지난 이십여 년 K-거버넌스 역사를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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