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할랄 경제권부터 아프리카 젊은 소비층 공략미국·중국 성장성 둔화, 새로운 수출 공식 등장수출 산업 넘어 현지화 전략으로 구조 전환
국내 식품업계의 해외 전략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한동안 미국과 중국은 K푸드 기업들의 '필수 코스'였다. 미국에서 브랜드를 키우고 중국에서 규모를 확보하는 것이 글로벌 전략의 정석으로 통했다. 그러나 최근 CJ제일제당, 삼양식품, 오뚜기, 대상 등의 행보를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미국과 중국을 넘어 중동·아프리카·동유럽·일본 등 이른바 '제3시장' 확보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해외 사업 확대처럼 보이지만 업계에서는 이를 단순한 수출 다변화가 아닌 'K푸드 성장 공식의 변화'로 해석한다.
과거 K푸드의 글로벌화가 한류에 올라탄 수출 확대였다면, 이제는 글로벌 식품기업으로 살아남기 위한 구조 전환이 시작됐다는 의미다.
국내 식품사들이 해외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명확하다. 한국 시장 자체가 구조적 저성장 국면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식품산업은 기본적으로 인구 산업이다. 사람이 늘어야 소비가 늘고 시장이 커진다. 하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인구가 감소하는 국가 중 하나다. 출생아 수는 1995년 71만명을 넘었지만 지난해에는 23만명 수준으로 줄었다. 합계출산율은 0명대에 머물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소비자가 줄어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미 식품 시장은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다. 라면, 과자, 음료, 냉동식품, 간편식 등 대부분 카테고리에서 보급률이 포화 상태다.
신제품이 시장을 키우기보다 기존 제품의 점유율을 빼앗는 '제로섬 경쟁'이 반복되고 있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신제품을 출시하면 시장 자체가 커졌지만 지금은 경쟁사 제품을 뺏어오는 구조"라며 "광고비와 마케팅 비용은 늘어나는데 수익성은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결국 국내 시장만으로는 성장도, 수익성도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 실제 해외 비중이 높은 식품기업들은 실적이 우상향한 반면, 내수 비중이 높은 기업들은 매출 증가에도 영업이익이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해외 매출 비중이 전체 10% 정도에 그치는 오뚜기의 경우, 매출은 2조7390억원에서 3조6745억원으로 매년 꾸준히 성장세를 기록했으나, 영업이익은 2023년 2524억원을 기록한 이후, 2024년 2220억원, 2025년 1773억원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롯데웰푸드도 마찬가지다. 매출은 2배 가까이 늘었으나, 영업이익은 2023년 1170억원을 기록한 이후 2024년 1571억원, 2025년 1095억원으로 뒷걸음질쳤다. SPC삼립, 빙그레 등도 비슷한 상황이다.
흥미로운 것은 식품사들이 해외로 나가는 이유가 단순히 내수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기존 핵심 시장이었던 미국과 중국의 환경도 달라지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시장이지만 경쟁 강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한때 K푸드가 아시아 식품이라는 희소성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글로벌 기업들과 정면 승부해야 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한국 브랜드 자체가 프리미엄으로 인식됐지만 최근에는 현지 기업들의 품질 경쟁력이 크게 올라왔다. 경기 둔화와 소비 위축도 변수다. 중국은 4월 중국 소매판매액은 3조7247위안으로 전년대비 0.2% 증가하는데 그쳤고, 이달 초 중국인민은행(PBOC)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분기 중국 소비자가 소유한 신용카드는 6억8700만개로, 전분기 대비 900만개 감소했다. 산업생산도 전년 동기 대비 4.1% 성장하는데 그쳐 시장 기대치를 하회했다. 전반적으로 산업·경제가 위축된 상황이다.
결국 미국과 중국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성장률만 놓고 보면 예전 같은 폭발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장이 됐다.
그래서 기업들이 찾기 시작한 곳이 바로 중동과 아프리카다. 최근 업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키워드는 단연 '할랄(Halal)'이다. 할랄은 단순한 종교 인증이 아니다. 식품기업 입장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경제권에 진입할 수 있는 입장권에 가깝다.
전 세계 무슬림 인구는 약 20억명에 달한다. 이는 중국과 미국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다. 특히 중동 국가들은 구매력이 높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걸프 국가들은 석유 산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소비와 관광 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
CJ제일제당과 삼양식품, 오뚜기가 경쟁적으로 할랄 인증을 확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업계에서는 "중동 공략은 특정 국가 공략이 아니라 글로벌 무슬림 시장 전체를 겨냥한 전략"이라고 평가한다.
삼양식품이 최근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곳은 의외로 아프리카다. 당장 시장 규모만 놓고 보면 미국이나 중국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기업들이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인구 구조 때문이다.
유럽은 늙어가고 있다. 중국도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다. 반면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젊은 대륙이다. 유엔에 따르면 향후 세계 인구 증가분의 상당수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K콘텐츠 소비층과 겹치는 젊은 세대가 압도적으로 많다. 아프리카 15~35세 청년 인원 수는 총 8억30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아프리카를 현재의 동남아 시장과 비슷한 단계로 평가한다. 지금은 규모가 작지만 먼저 진입한 기업이 향후 수십 년간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는 의미다.
더 중요한 변화는 전략 자체다. 과거 K푸드 해외 진출은 수출 중심이었다. 국내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해외로 보내는 구조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현지 생산공장과 판매법인 설립이 늘고 있다.
CJ제일제당의 미국·헝가리 공장, 삼양식품의 유럽 법인, 오뚜기의 일본 법인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K푸드가 더 이상 '수출 산업'이 아니라 '현지 산업'으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글로벌 식품기업인 네슬레(Nestlé), 펩시(PepsiCo), 유니레버(Unilever) 역시 대부분 현지 생산과 현지 유통 체계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K푸드도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K푸드의 승자는 미국과 중국에서 성공한 기업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중동에서 할랄 생태계를 구축한 기업, 아프리카에서 유통망을 선점한 기업, 유럽에서 현지 생산 체계를 갖춘 기업이 새로운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최근 식품업계의 경쟁은 라면과 만두를 누가 더 많이 파느냐가 아니라, 누가 먼저 글로벌 공급망과 현지 유통망을 확보하느냐로 바뀌고 있다.
즉, 지금 CJ제일제당, 삼양식품, 오뚜기, 대상이 벌이는 경쟁은 수출 경쟁이 아니다. '포스트 미국·중국 시대'를 선점하기 위한 글로벌 영토 전쟁이다.
이 점에서 중동과 아프리카를 향한 K푸드 기업들의 움직임은 단기 실적보다 향후 10~20년의 성장 지도를 바꿀 수 있는 전략적 투자로 봐야 한다. 단순히 새로운 시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국 식품산업의 미래 성장축을 해외로 옮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뉴스웨이 서승범 기자
seo6100@newsway.co.kr
저작권자 © 온라인 경제미디어 뉴스웨이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