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메모리·日 소부장 결합···세계 3위권 시장 구상SK하이닉스, 日 메모리 합작공장 타당성 '검토'한일 LNG 수입 1억1170만톤···공동구매 효과 기대
미·중을 축으로 첨단산업 공급망이 양분되는 가운데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한일 경제공동체'를 승부수로 꺼내 들었다. 한국의 메모리반도체·완제품 경쟁력과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역량을 결합해 약 6조달러 규모의 세계 3위권 경제블록을 만들자는 구상이다.
31일 업계에 따르면 최 회장은 전날 일본 센다이에서 열린 한일 저출산 대응 심포지엄에서 경제공동체 구상을 다시 제시했다. 양국 경제를 공동체 형태로 결합하면 기업과 개인의 비용을 낮추고 안정적인 소득 기반을 확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최 회장은 최근 일본과의 협력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2023년 7월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일본을 우선 파트너로 삼아 7조달러 규모의 '제4 경제블록'을 만들자고 제안한 데 이어 같은 해 11월 도쿄포럼에서는 이를 '한일 경제연합체' 구상으로 구체화했다. 2024년 5월 닛케이포럼에서는 "한일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고 지난해 7월에도 단순한 경제협력을 넘어 유럽연합(EU)과 같은 경제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고 재차 주장했다.
최 회장이 일본을 협력 대상으로 꼽는 배경에는 우선 경제 규모가 있다. 2025년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한국 1조7903억달러, 일본 4조1864억달러로 양국을 합치면 약 5조9800억달러에 이른다. 최 회장은 경제권을 구축하면 한국 기업이 1조8000억달러 규모의 국내 시장을 넘어 약 6조달러 경제권을 기반으로 투자와 생산을 설계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시장 규모만 보면 미국과 중국의 명목 GDP는 각각 약 30조달러와 19조달러로 한일 합산액보다 크다. 그러나 경제공동체 구축 가능성에서는 일본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게 최 회장의 판단이다.
경제공동체를 구성하려면 교역 확대뿐 아니라 사람과 자본의 이동, 자격과 기술표준의 상호 인정, 규제 조정 등이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시장경제와 법·제도 체계가 유사하다. 산업·기술 수준의 격차도 상대적으로 작아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제도 조정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산업 구조가 맞물려 있다는 점도 일본을 협력 대상으로 꼽는 이유다. 한국과 일본은 반도체·배터리·자동차·조선 등에서 경쟁하는 동시에 공급망에서는 소재·부품·장비와 완제품 생산이 연결돼 있다.
올해 1분기 세계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38%)와 SK하이닉스(29%)의 매출 점유율은 합계 67%에 달한다. 일본 기업들은 세계 반도체 소재·부품 시장의 48%, 장비 시장의 30%대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이 메모리반도체 생산에 강점을 갖고 일본은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구조다. 양국이 공급망을 연계하면 공동 연구개발과 소재·장비 조달 비용을 낮추고 공급망 충격에 대한 대응력도 높일 수 있다.
산업 협력은 실제 투자 검토로도 이어지고 있다. 최 회장은 이날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SK하이닉스가 일본 내 메모리반도체 합작공장 설립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급증하는 인공지능(AI) 수요에 대응하고 생산 비용을 낮추기 위한 방안이다. 전력과 용수가 풍부한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전역을 살펴보고 있지만 잠재적 파트너와 구체적인 입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에너지 조달에서도 양국 협력의 실익이 클 수 있다. 지난해 LNG 수입량은 일본 6498만톤, 한국 4672만톤으로 합계 약 1억1170만톤에 달한다. 세계 최대 LNG 수입국인 중국의 6843만톤보다 4327만톤 많다. 양국이 구매 시기와 물량을 조정하거나 공동구매에 나서면 LNG 공급사와 가격 및 장기계약 조건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영향력을 높일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첨단산업 공급망이 갈라지는 상황도 한일 경제공동체 구상의 배경으로 꼽힌다. 미국은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527억달러를 투입해 자국 내 생산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계 기업에 공급되는 일부 첨단 컴퓨팅 반도체는 제3국을 거치더라도 미국 정부의 수출 허가를 받아야 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중국은 20개 주요 전략광물 가운데 19개에서 세계 최대 정제국이며 평균 점유율은 70%에 달한다. 지난해 4월부터는 7개 중희토류와 관련 제품의 수출도 통제하고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를 주력 산업으로 둔 한국과 일본 모두 미국의 기술 통제와 중국의 자원 통제에 동시에 노출된 구조다.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이 핵심광물을 공동 조달하고 반도체·배터리·AI 분야의 인증과 기술표준을 조율하면 미·중의 공급망 정책에 공동 대응할 여지가 생긴다.
시장에서는 유럽연합(EU)식 공동체를 한 번에 구축하기보다 반도체 합작투자와 LNG 공동구매처럼 이해관계가 맞는 분야부터 협력을 제도화하는 단계적 접근이 현실적인 수순으로 거론된다.
최태원 회장은 "앞으로의 한일 협력을 단순히 서로 더 많이 사고파는 관계로만 봐서는 안 된다"며 "더 큰 시장과 산업 생태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한일경제연대"라고 말했다.
이어 "두 나라를 합하면 GDP가 6조 달러를 넘는다"며 "세계 시장이 블록화되는 상황에서 한일이 서로의 시장을 넓혀주는 파트너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스웨이 이승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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