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 앞도 안보이는 암흑 같은 스크린에 불이 켜지고 화면 한 가득, 능선과 능선이 맞닿은 산수화 한폭이 펼쳐진다. 단원 김홍도의 산수화를 연상케 하는 이 절경에 흰눈이 흩뿌려지면서 한(恨) 서린듯 애절한 OST가 흘러나온다.
영화 ‘대호’는 그랬다. 첫 장면부터 고결한 자태를 드러낸 한국의 겨울산과 소복이 쌓인 눈 그리고 한맺힌 여인네의 노랫가락을 (조금은)길게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가 그저 단순히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부활시키는데 그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주인공 김대호씨는 어디 갔나요”
최민식의 농담같은 이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 ‘대호’와 마주하기 전에는 몰랐다. 그리고 왜 그가 영화 시작 전 이토록 가벼운 농담을 던져야했는지 그때는 몰랐다.
‘대호’(감독 박훈정)는 일제 강점기 반만년 역사중 가장 치욕스러웠던 시기, 조선 최고의 명포수 천만덕으로 분한 최민식과 제작진이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부활시킨 영화다. 제목에서 알 있듯이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가 이 영화 전반을 이끌고 갈 것을 예고한다. 곁들여 영화를 이끌고 갈 주요한 감정선 안에 호랑이가 들어가 있음을 알려준다.
때문에 영화 시작부터 최민식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와 김대호씨(극중 호랑이를 가리키는 최민식 배우의 애칭)의 호흡은 ‘대호’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박훈정 감독의 선택은 옳았다. 관록의 배우 최민식은 명불허전 연기력으로 촬영내내 단 한번도 마주하지 못한 김대호씨와 인간과 동물이 아닌 우주적 깊은 교감을 나누며 보는 이들의 가슴을 흔든다.
영화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조선시대 명포수였던 천만덕(최민식 분)은 어떤 연유로 더이상 총을 잡지 않고 산속에서 약초나 캐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천만덕과 상충되는 구경(정만식 분)과 인간미 넘치는 칠구(김상호 분)가 각각 다른 색깔로 그 시대 인간상을 보여준다.
구경과 칠구는 더이상 총을 잡지 않으려는 천만덕을 대신해 영화 내내 산속을 헤매며 사냥에 나서며 볼거리를 제공하고, 급기야 대호 잡이에 나서면서 극을 클라이맥스로 이끈다. 여기에 천만덕의 아들 석이 역의 성유빈은 신의 한수. 최민식이 극찬할 만큼 노련한 연기로 극의 재미를 이끈다.
극중 천만덕과 대호는 인간과 동물의 한계를 넘어 마치 한 가족 같은 교감을 나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탄압과 억압 그리고 자연의 순리라는 대명제를 던지며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 모은다.
여기에 인간도 동물도 똑같이 가진 부성애를 통해 진한 감동까지 선사해 조금은 지루한 러닝 타임을 견디게 만들어준다.
무엇보다 영화 첫 장면에서 클로우즈업 된 천만덕의 얼굴과 중반 이후 위용을 드러낸 대호의 얼굴을 비교하는 것 역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된다. 마치 최민식의 얼굴을 그대로 CG화 시킨것 처럼 처연함이 섞인 날카로운 표정이 서로 닮아있다.
그렇게 그들은 눈빛과 표정만으로 서로의 감정과 한(恨)을 주고 받으며 그 어떤 대사보다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바로 이 지점을 느끼는 순간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가 제대로 가슴에 스민다.
그리고 이 지점을 많은 관객들이 느끼는 순간 ‘대호’는 대박 대열에 들어서지 않을까 조심스레 점쳐본다.
물론 호랑이 CG는 100% 완벽하다 볼 수 없다. 특히 관객은 이미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호랑이 CG의 모든 것을 봤다. 때문에 극초반 감질나게 등장하는 김대호씨의 모습에서 다소 실망하고 이어 실체를 모두 드러낸 장면에서도 2%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맹수가 가진 포악한 공격성에 삶의 비극을 짊어진 서글픈 표정까지 섬세한 감정이 살아나면서 실망감을 상쇄시킨다.
영화 ‘대호’는 인간과 동물, 탄압과 억압 그리고 아비와 자식 등 폭넓은 감정선을 아우르며 묵직한 울림에 관한 이야기다. 목표와 희망을 잃고 부유하는 대한민국 관객들에게 땅을 울리고 하늘을 흔드는 호랑이의 기운이 불어 넣길 바란다.
홍미경 기자 mkhong@
뉴스웨이 홍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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