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조선업 구조조정은 사실상 실패한계업종 정리도 몇년째 제자리 걸음금융권에 주도권 줬더니 혼선만 야기컨트롤타워 다시 세워 동력확보 해야
금융위원회가 주축이 된 범부처 구조조정협의체가 지난해 10월 즉시 구조조정 대상으로 꼽았던 5대 취약업종으로는 조선, 해운, 철강, 석유화학, 건설 등이다. 그러나 계획안 도출 이후 1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구조조정의 속도는 매우 더딘 편이다. 공급 과잉에 시달리는 철강과 석유화학업은 자체 구조조정을 거의 하지 않고 있고 정부가 가장 강력하게 구조조정을 천명했던 조선과 해운업은 구조조정은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여기에 선방했던 건설업계도 생존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구조조정 정책을 제어해야 할 경제 정책 컨트롤타워 역시 대내 정세 혼란 등으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면서 구조조정 활동은 사실상 멈춰 섰다. 당국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사이 구조조정 대상 기업의 체질은 더욱 악화됐고 후방산업 역시 괴사 위기에 놓였다.
◇사라지지 않는 업계 내 혼란 = 철강업계와 석유화학업계의 구조조정 적체 현상은 장기화를 넘어 고착화 국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 업계의 구조조정 속도가 늦어지는 것은 자체 구조조정 활동을 사실상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정부는 국내 철강업체들의 현재 후판 생산량은 80만톤 안팎에 이른다. 수요가 부족하다보니 생산 능력인 120만톤보다 40만톤 적은 수준에 그치고 있다.
정부는 자발적 설비 폐쇄 등을 통해 구조조정에 나서달라고 업계에 제안한 상태지만 업계는 눈치만 보고 있다. 업계가 눈치를 보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설비 폐쇄 후 재가동을 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데 이 점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후판을 활용하는 조선업계의 수요 변화에 따라서 후판 생산 수요의 부활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데 이 문제를 쉽게 예단할 수 없기 때문에 업체끼리 눈치만 보면서 구조조정을 미루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공급과잉 현상의 심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석유화학업계 역시 정부가 자발적인 공급량 조절과 설비 통합 내지는 설비 폐쇄를 업계에 제안했지만 업계가 이를 거부하고 있어서 구조조정이 어려운 상황이다.
◇헛물만 켜는 ‘깜깜이 정부’ = 현재의 구조조정은 정부가 주도하고 있지만 정부가 업계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헛물만 켰다가 일을 그르친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해운업계 구조조정이다. 정부가 나름의 의욕을 갖고 구조조정에 나섰지만 사실상 공멸하고 말았다.
정부는 현행 복수 선사 체제의 유지와 단일 선사 체제로의 변화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각 선사에 의견을 묻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선사 간 합병을 추진하다가 모두에게 생채기를 남기기도 했다.
실제로 해운업계 구조조정 논의 초기였던 지난해 가을 정부는 한진해운에 현대상선과의 합병을 제안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진해운은 현대상선보다 영업 기반이나 자산, 실적 등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기에 정부가 한진해운 측에 합병 주체로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정부는 “합병 추진은 낭설일 뿐”이라고 부인했지만 한진해운은 “정부로부터 요청을 받았지만 합병 추진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서로 다른 답변을 내놨다. 현대상선도 정부의 합병 추진설을 정면으로 부인하면서 구조조정에 대한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다.
이후 정부는 연신 구조조정 진행 과정에서 헛발질을 했다. 유동성 악화로 침몰 위기에 놓인 한진해운을 죽이고 현대상선을 국내 유일의 국적 선사로 키우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놨지만 그대로 시행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업계를 더 망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정부는 한진해운이 매물로 내놓은 자산을 현대상선이 인수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대로 개입에 나섰지만 현대상선은 한진해운 자산을 인수하는데 실패했다. 그 결과 현대상선의 유동성 현금은 감소했고 누적 영업손실만 늘어나 전체 업계를 망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조선업도 비슷한 처지다. 금융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부는 몇 달째 대우조선해양 존폐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다가 결국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3사 체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재계 안팎에서는 업계 안팎의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정부가 원칙도 없이 어줍잖은 계획을 내세워 상황을 넘기려고만 한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기업의 내부 혼란을 막고 원활한 구조조정이 진행되려면 정부가 중심을 잘 잡아줘야 하는데 현재 같은 상황이라면 잘 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면서 “내년이 사실상 업계 구조조정의 마지막 골든타임인 만큼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꼬집었다.
◇자발적 빅딜 환경을 만들자=재계 안팎의 구조조정의 원활화와 사업구조 재편의 모범 답안 도출을 위해서는 자발적 기업 합병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재까지 재계 내에서 진행된 자발적 사업구조 재편 작업은 삼성그룹이 주도했던 두 차례의 ‘빅딜’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삼성그룹은 지난 2014년 11월 한화그룹과 함께 화학과 방위산업 계열사에 대한 맞교환을 실시했다. 이를 통해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 삼성탈레스, 삼성테크윈 등 4개 회사의 간판에 삼성의 푸른 타원이 내려가고 한화의 주황색 원형 로고가 새겨졌다.
삼성은 이듬해인 2015년 10월에도 롯데그룹과 2차 빅딜을 단행하면서 삼성정밀화학, 삼성SDI 케미컬부문, 삼성BP화학을 롯데로 넘겼다.
이들 거래는 재계의 대표적인 ‘윈-윈 빅딜’ 사례로 꼽힌다. 삼성은 주력 사업인 전자와 금융 사업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편하기 위해 비주력 업종인 화학 계열사에 대한 과감한 정리가 성공했다. 한화와 롯데 역시 주력으로 키우려던 화학 사업에 대한 육성 기반이 열렸다.
물론 빅딜을 통해 주인이 바뀐 회사의 변화 과정이 모두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한화종합화학 등 일부 회사의 재출범 과정에서는 노동조합이 강렬하게 반발하는 등 적잖은 진통을 일부 겪었다. 그러나 현재는 모든 계열사들의 경영이 정상 궤도에 올랐다.
이렇듯 삼성발 2대 빅딜은 재계 안팎에서 ‘자발적 빅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전해줬다. 그러나 이후 비슷한 형태의 자발적 사업 교환 활동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굳이 빅딜이 아니더라도 자발적인 구조조정으로 위기를 탈출한 사례 또한 감감 무소식이다.
재계 안팎에서는 원활한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재계 스스로 사업 교환을 통한 사업구조 재편에 나설 수 있도록 분위기 전환에 나서는 한편 정부도 자발적 구조조정에 나서는 기업을 대상으로 세제 혜택을 강화하는 등 정책적인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더불어 사업 교환의 대상이 되는 기업 내부에서도 무작정 사업 교환을 반대할 것이 아니라 꾸준한 대화와 합리적 대안의 모색을 통해 사업 교환 작업이 순탄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양보를 통한 협조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지난 3월에 제정된 후 한 차례 개정 작업을 거쳐 공포된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기업활력법, 이하 원샷법)’에 대해서도 총체적인 재개정 작업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안팎에서 잦아지고 있다.
당초 원샷법은 입법 추진 당시 자발적인 기업 구조조정의 법적 추진 동기를 마련하게 되는 만큼 활발한 활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높은 참여도나 관심에 비해 실질적 구조조정 효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쏟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논란 투성이의 끼워맞추기식 원샷법이 형식적 절차에 머문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에 산업계의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는 방향으로 법을 다시 바꾸고 정부도 법에 맞게 자발적으로 경영 환경 개선 작업에 나서는 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재계의 중론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이 사실상 실패한 상황에서 이제는 구조조정의 모든 작업 권한을 기업 등 민간에 이양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 “민간 기업이 자신들이 영위하고 있는 각 사업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민간에 모든 권한을 맡기고 정부는 전폭적인 지원으로 화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뉴스웨이 정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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