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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운 역사, 한 순간에 지워지다

[한진해운 파산선고]대한민국 해운 역사, 한 순간에 지워지다

등록 2017.02.17 11:25

임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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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설립돼 수차례 위기 극복1988년 국내 1호 선사 대한상선 인수韓해운업 역사와 궤 함께했으나장기불황·치킨게임 파고 못 넘어

대한민국 해운 역사, 한 순간에 지워지다 기사의 사진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수송보국(輸送報國)’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77년에 설립한 한진해운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서울중앙지법 제6파산부(재판장 정준영 파산수석부장판사)는 17일 오전 9시40분쯤 한진해운에 대해 파산선고를 내렸다.

재판부는 “한진해운이 주요 영업을 양도함에 따라 계속기업가치 산정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청산가치가 계속기업가치보다 높게 인정돼 지난 2일 이미 회생절차 폐지 결정을 했다”며 “2주일의 항고기간 동안 적법한 항고가 제기되지 않아 파산 선고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세계 7위, 국내 1위 해운사였던 한진해운은 세계 해운시장의 장기불황과 선사들 치킨게임에서도 정상영업을 지속하며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쏟았다. 임직원들은 해운업계 최고의 영업망과 인력을 갖췄고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긴 경험이 있었기에 불황파고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정부의 구조조정 실책과 한진그룹과 채권단간 책임 떠넘기기로 인해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한진해운은 고 조중훈 회장이 1967년 설립한 대진해운이 해제되는 아픔을 겪고 심기일전으로 세운 기업이다. 고 조중훈 회장은 1966년 퀴논항에서 거대한 미군 수송선을 보고 감명 받아 해운업에 뛰어들었다. 1967년 자본금 2억원을 들여 대진해운을 세웠지만 6년 만에 닥친 오일쇼크에 파산을 경험했다.

이에 조 회장은 실패 원인을 분석해 4년 후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조 회장이 한진해운을 설립한 다음해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해 경영 위기에 몰렸지만 비상경영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 당시 조중훈 회장은 대한항공과 한진의 각 부문별 전문요원으로 구성된 경영개선팀을 한진해운에 투입해 경영정상화를 꾀했다. 그 결과 채 1년도 되기 전에 자본잠식 상태에서 벗어나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1988년에는 회생 불가 판정을 받은 국내 1호 선사인 대한상선(대한선주)를 인수했다. 대한 상선 인수를 통해 한진해운은 사실상 대한민국 1호 선사로 불렸다.

1992년 국내 최초 4000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인 ‘한진오사카호’를 띄웠으며 또 미국 시애틀, 롱비치 등 주요 항만에 전용 터미널을 세워 사세를 키웠다.

1995년 거양해운, 1997년 독일 2위 선사 DSR-Senator를 인수하는 등 공격적으로 몸집을 불렸다.

2002년 조중훈 회장이 타계한 후 경영 전면에 나선 셋째아들인 조수호 회장도 2006년 지병으로 사망, 한진해운에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이에 조수호 회장의 부인인 최은영 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섰지만 해운업에 대한 전문성과 경영 경험 부족이 위기를 초래했다. 최 회장은 호황기 때 비싸게 장기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2008년 리먼사태 이후 지속된 글로벌 해운업 불황에 운임은 호황기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결국 비싼 용선료로 인한 누적 손실이 발생, 회사 경영 상태는 악화됐다.

이에 최 회장은 시숙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지분과 경영권을 넘겼다. 조 회장은 한진해운 유동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무보수 경영에 나섰으며 약 1조 2500억원을 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 회장도 불황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한진해운은 2014년부터 글로벌 해운시장의 경쟁 심화, 해운 운임 급락 등에 의한 장기 불황을 버텨내지 못했다.

유동성 위기가 심해지자 조 회장은 지난해 4월 자율협약(채권단 공동관리)을 신청했다. 하지만 채권단의 자구책 요구를 충족하지 못했고 채권단은 자금 지원 중단을 결정, 결국 한진해운은 9월 법정관리에 들어갓다.

이후 한진해운 발 물류대란이 발생, 한진해운의 선박은 세계 곳곳에서 가압류 됐고 40년간 만들어온 영업망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법정관리 기간 동안 법원은 한진해운의 인력과 주요 자산을 매각했다. 결국 한국의 해운산업 역사와 궤를 같이한 한진해운은 마지막 파고를 넘지 못한 채 허망하게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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