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 전문가 국내 첫 다이너마이트 생산일심과 정면돌파 정신 오늘날 한화 일궈석유화학·기계·금융 등 다각화 그룹 기반
김종희 회장과 화약과의 인연은 20살 때부터 시작됐다. 충청남도 출신인 김종희 회장은 고등학교 졸업 후 당숙의 추천으로 서울 남대문에 있던 조선화약공판에 취직했다. 일본인의 회사였지만 신임을 받아 회사에서 화약 제조법을 배우면서 국내 얼마 없는 조선인 화약 기술자가 됐다.
광복 후 김종희 회장은 회사의 지배인이 되지만 상당수 조선인 직원들이 회사를 나가면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빼돌려 회사 경영이 위태로워졌다. 그는 좌절하는 대신 무작정 한국에 들어온 미군 기지를 찾아가 남은 공사용 다이너마이트 판매 거래를 시도하고 성공시켰다. 미군 공병대의 화약 담당자인 스미스 대위가 그의 배짱에 호감을 느끼고 거래에 응한 것이다.
김종희 회장은 6·25전쟁으로 다시 시련을 겪었다. 전쟁 초기 김종희 회장은 바로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화약고의 다이너마이트를 지켰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위원회에 화약 재고품을 신고하면서 기술자가 아니면 관리할 수 없다고 설명한 후 숨 죽여지내다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미군을 찾아 화약고를 부탁했다. 1951년 1.4 후퇴가 일어나자 외자관리청에서 트럭을 빌려 화약 상자를 밤새 영등포 창고로 운반한 후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김종희 회장은 부산에서도 미군 병참기지의 화약관리 계약을 따내고 큰 돈을 벌었다. 이 돈으로 1952년 민간 불허 매각이 결정된 조선화약공판을 사들여 한국화약주식회사로 새롭게 세웠다. 6·25전쟁으로 화약 수요가 늘자 그는 폐허가 된 인천화약공장을 복구했으며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했다. 한국의 노벨, 다이너마이트 킴이라는 별명도 이때 얻었다. 회사는 산업용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매진해 1960~70년대 경부고속도로 등 도로 공사부터 각종 부두, 광산 공사 현장에 화약을 공급했다.
고속 성장하던 회사는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로 위기에 빠졌다. 회사 화약을 싣고 가던 기차가 폭발해 사상자 1400여명과 약 61억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김종희 회장은 사고 다음날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피해 복구에 직원을 투입했다. 자신의 전 재산 90억원도 피해 보상금으로 내놨다. 그의 진심에 회사에 대한 비판 여론도 차츰 수그러들었다.
김종희 회장은 1981년 과로와 병환이 겹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회사는 석유화학, 기계, 미사일, 건설, 식품, 금융 등 다양한 영역으로 사업을 넓혀 국내 10대 재계 그룹 기반을 갖췄다. 김종희 회장의 장남인 김승연 회장 지휘 아래 회사는 1992년 한화그룹으로 사명을 바꿨다.
기업과 나라 발전에 힘쓴 김종희 회장의 노고를 두고 재계에선 경영인의 귀감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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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김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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