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망 열려야 민생 안정된다”전쟁 후 폐차 개조해 버스 운행
당시 박인천 회장은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마흔 여섯이었다. 1946년 택시업 면허를 취득하고 광주택시를 창업했다. 당시엔 노인 취급을 받을 나이대였지만 새 삶에 대한 의지로 필생의 아이템을 찾아낸 셈이다.
“당시 교통이 아주 불편해 도대체 택시란 게 광주에 한 대가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교통사업의 투신 동기다.” 박인천 회장은 1948년부터 버스로 방향을 바꿨다. 창업이 쉽지 않았지만 두드리면 열린다는 각오로 철저한 운행시간과 세심한 차량정비를 강조해 ‘틀림없는 버스’란 평판을 얻게 됐다.
“손님이 막차를 놓치거나 정기시간을 놓쳐 당황할 때 차가 여유가 있으면 임시차라도 내서 그 손님의 불편을 빨리 도와드려라.” 광주여객은 곧 전남지역 3대 운수업체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차가 고장 나면 승객을 내려놓는 게 당연했던 시절에 광주여객의 특별한 승객 배려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잘나가던 시절도 잠시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사업 거점이던 광주는 인민군이 장악했고 박 회장은 반동분자로 분류돼 수감됐다. 3평 공간을 16명이 쓰는 열악한 상황에서는 목숨 부지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절체절명의 고비였지만 박 회장은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전국 곳곳에서 온 동료 수감자들에게 해당 지역의 도로와 교통 사정을 물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와 민생 수습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교통망이 열려야 민생도 빨리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인민군이 떠나자 그는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부서진 차체들을 찾아 목탄차 두 대를 조립하고 휘발유와 타이어를 구하고자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동분서주했다. 그렇게 다시 운행을 재개한 광주여객 버스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상징처럼 보였다.
이런 태도는 과감한 혁신으로 이어지며 기업 도약의 기틀이 됐다. 1957년 정부의 휘발유 소비 억제로 수많은 운수업체들이 도산하던 때 꺼내든 디젤엔진으로의 교체 결정은 지금까지도 위기를 기회로 바꾼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농촌에서 발동기에 쓰는 경유는 공급도 충분하고 가격도 저렴하다. 휘발유 억제 정책은 위기이자 기회다”고 말한 그는 국내 버스회사 중 어느 곳도 시도치 못한 디젤엔진 도입을 시도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기존 기름값의 3분의 2를 절감했다.
그룹 사상 가장 혁신적인 시도 중 하나로 불리는 타이어도 같은 맥락이다. 박 회장은 끝내 타이어공장을 직접 세웠다. 한때는 차체 하나를 못 이겨내 ‘호박타이어’란 오명도 얻었다. 그러나 박 회장은 투자와 기술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사업 시작 27년 만인 1972년에 박인천 회장은 금호실업을 세우고 그룹회장으로 취임했다. 마흔 여섯에 출발했음에도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국내 운수업의 패러다임을 제시해온 치열했던 삶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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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임정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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