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일부는 참담한 듯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최종 질문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로 향했다. 안민석 의원은 “전경련 해체에 반대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고(故) 구본무 LG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고(故) 조양호 한진 회장, 정몽구 현대차회장, 허창수 전경련 회장(당시 GS회장)등 6명의 총수가 손을 들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앞으로 전경련 활동을 하지 않고 기부금 출연도 중단하겠다고 했다. 전경련 해체를 반대한다고 손든 정몽구 회장도 지속된 질의에 “그럴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구본무 LG 회장은 울림을 남겼다. 구 회장은 “전경련은 기업의 친목 단체로써 한국의 헤리티지로 남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IMF 외환위기 시절 정부의 ‘반도체 빅딜’에 따라 LG는 반도체 사업을 현대로 넘긴 아픔이 있다.
당시 구 회장은 서운함에 오랜 기간 전경련에 발걸음을 끊고 지냈다. 그런 구 회장이 미국 재계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 사례까지 언급하며 비판 여론에 휩싸인 전경련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점에서 재계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사실 구 회장의 당시 직언은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었다. 앞서 2011년 8월에도 전경련은 헤리티지 재단을 벤치마킹해 재계 싱크탱크로 거듭나겠고 했다. 허창수 회장은 당시에도 전경련을 이끌었다. 국회 지식경제위원회가 주최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 공청회에서 박진 한나라당 의원의 질의에 허 회장은 이런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전경련의 실질 변화는 전무했다. 그사이 국민적 여론에 떠밀려 4대 그룹은 국정농단 청문회 직후 전경련을 탈퇴했다. 때맞춰 탄생한 새 정부 출범 이후 모든 청와대 초청 행사에서 전경련은 제외됐다. 재계를 대표한 각종 현장의 목소리는 대한상공회의소나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도맡았다.
잊힌 존재로 부유했던 전경련이 지난해 허창수 회장이 GS 회장직을 내려놓으면서 최근 목소리를 다시 냈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도 코로나19 국면에서 연구 자료를 내놓으며 재계를 대표한 기존 활동에 재차 불을 지폈다.
그러나 헤리티지 재단이 예산 모금부터 집행 내용까지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과 달리 전경련은 이런 기초적인 벤치마킹조차 하지 않은 채 공회전했다. 전경련이 하던 일상적인 활동을 대한상의와 경총에서 하고 있으니 과거 비판받던 여론 프레임에 갇힌 채 애매한 상황에 놓였다는 의아함도 제기된다.
그사이 지난해 3월 ‘행동하는 자유시민’이라는 이른바 보수 표방 시민단체가 출범하며 한국의 ‘헤리티지 재단’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일도 나왔다. 전경련이 애초 헤리티지 재단이 되겠다고 했던 9년 전에 제대로 된 칼을 빼 들었다면 얽히지 않을 새로운 정치 프레임까지 발생한 셈이다. 전경련이 그토록 강조한 ‘경제는 경제고 정치는 정치’라는 신념까지 닿기엔 더욱 각고의 노력이 필요해졌다.
뉴스웨이 임정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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