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에 6000억원 매각, 그린케미칼 투자 확대SK플라즈마·바사 등 자회사 분사로 성장동력 잃어투자받던 벤처들 '근심'···"협상 이어가야"
그간 새 성장엔진 확보를 위해 바이오벤처들과 '오픈 이노베이션'을 적극 추진해 오던 SK케미칼이 사업부 매각을 결정하자 협업을 이어가던 벤처 기업들은 근심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에서 투자가 중단될 경우 사업 유지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2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SK케미칼은 전날 공시를 통해 국내 사모펀드(PEF)운용사인 글랜우드프라이빗에쿼티(글랜우드PE)에 제약사업부를 매각하기로 하고, 본 계약 체결 전 기본적 사항을 정하기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추정 매각가는 6000억원 규모로 연내 계약 체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글랜우드PE 측의 실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번 제약부문 매각은 사업성이 떨어진 사업 정리를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주력 사업에 투자하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SK케미칼의 사업은 크게 친환경 소재 사업을 하는 그린케미칼과 제약 및 백신 사업을 하는 라이프사이언스 부문으로 구분된다.
매출 대부분은 그린케미칼에서 나온다. 지난해 전체 매출액 1조8292억원 중 약 77%(1조4019억원)가 이 사업에서 발생했다. 반면 라이프사이언스 부문에서는 백신 개발 자회사인 SK바이오사이언스 매출을 제외할 경우 연 매출이 3000억원대에 불과하다. SK바이오사이언스 매출은 4567억원이었다.
SK케미칼 제약사업부는 자회사 분사 이후 성장동력을 잃은 상황이다.
회사는 지난 1987년 생명과학연구소 설립, 삼신제약 인수 등을 통해 제약 사업에 뛰어든 이후 신약 개발에 매진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번째 성과가 국산 신약 1호 위암 치료제 '선플라'다. 이후 천연물로 만든 관절염 치료제 '조인스', 발기부전 치료제 '엠빅스', 혈액순환 개선제 기넥신, 소염진통 패취제 '트라스트' 등의 포트폴리오를 확보했다.
이어 혈액제제 분야에 강점이 있던 동신제약의 지분을 인수하고 2006년부터 혈액제제 사업을 본격화했다. 혈액제제는 선천적 면역결핍질환, 혈우병, 화상 등에 쓰이는 필수의약품이다. 또 세계 생명과학의 패러다임이 '치료'에서 '예방'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백신 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2008년부터 인프라 구축과 연구·개발(R&D)에 약 5000억원을 투자하기 시작했고 2012년에는 안동에 백신 공장 L하우스 완공 후 프리미엄 백신 개발 전략을 추진했다.
회사는 혈액제제 사업과 백신 사업을 키우기 위해 관련 사업부만 떼어내기로 결정, 2015년 혈액제제 사업을 전담하는 SK플라즈마를, 2018년 백신사업을 담당하는 SK바이오사이언스를 출범했다. SK플라즈마는 물적분할을 통해 SK케미칼의 100% 자회사로 설립됐으나 2017년 SK케미칼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현재 지주회사인 SK디스커버리의 100% 자회사로 편입됐다. SK바이오사이언스의 경우 SK케미칼이 지분 68.18%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관절염 치료제, 혈액순환개선제 등 합성의약품 제약 사업만 남은 SK케미칼은 미래 성장 동력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택한 전략이 '오픈 이노베이션'이다. 회사가 보유하고 있지 않은 기술과 인프라를 확보하기 위해 외부와 협업하고 있다.
특히 스탠다임, 닥터노아, 심플렉스, 디어젠 등과 같은 AI 신약 개발 기업과 협업을 통해 알콜성지방간염과 특발성폐섬유화증, 류마티스 관절염 등의 질환을 타겟으로 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합성신약 기업 온코빅스와 '공동연구계약 협약식'을 갖고 혁신 신약 공동연구에 나서기도 했다.
또 스탠다임, 온코빅스 등에 전략적투자자(SI)로 참여해 수십억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하기도 했으며, J2H바이오텍의 상장 전 투자유치(pre-IPO)에도 참여했다.
갑작스러운 제약사업부 매각 소식에 SK케미칼과 협업하고 있거나 투자를 받은 바이오기업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투자 환경 위축으로 자금난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투자 중단 등의 변수가 생길 경우 회사 운영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벤처 관계자는 "(SK케미칼 제약사업부 매각 관련 사실을) 전혀 몰랐다. 기업 투자 담당자가 부서를 이동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아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추가 투자유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다 보니 내부 분위기도 매우 안 좋아진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전환상환우선주(RCPS) 형태의 투자를 받았다면 대출을 받아 투자금을 되돌려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반면 보통주계약은 상환 권리가 없기 때문에 (대출을 받아 투자금을 갚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이 경우 최악의 시나리오는 SK케미칼이 가지고 있는 벤처 주식을 각 기업이 모르는 기관에 넘기는 것이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업계는 SK케미칼 사업부 인수 후 글랜우드PE의 행보에 대해 예의주시하는 한편, 벤처들이 협상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SK케미칼과 전략적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 입장에서 (갑작스러운 사업부 매각 소식은) 당황했을 수 있겠지만 이런 일은 수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비일비재하다. 매각 전 소문이 날 경우 주가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화이트바이오 등 다른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매각 결정을 한 것이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볼 수 없다. SK그룹에서 SK바이오사이언스 등 백신 사업을 하고 있으니 그쪽에 집중할 필요가 있겠다는 정책적 판단도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며 "SK케미칼 제약사업부가 넘어가더라도 협력한 기업들에 대한 인수인계는 이뤄질 거다. 각 벤처들과 어떤 조건으로 협력 계약을 맺었는지 모르겠지만 협력이 왜 필요한지 서로 얘기를 해야 한다"며 "SK케미칼도 자사 파이프라인을 늘리고 사업을 더욱 공고하게 하기 위해 오픈 이노베이션을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이 반영되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글랜우드PE는 올해 LG화학의 진단사업부를 인수하면서 헬스케어 부문 사업에 발을 들였다. 내달 최종 인수를 마무리하는 LG화학 진단사업부(새로운 회사명 인비트로스)와의 사업적 시너지를 위해 이번 투자를 결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뉴스웨이 유수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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