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없이 이상을 노래하는게 어떤 의미가 있니? 고민해야 하지 않겠어?”
송몽규는 이같이 묻는다. 윤동주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설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로 영화는 기억된다. 이는 영화를 영원히 관객들의 가슴속에 살게하는 여운이다.
최근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를 언론시사회장에서 처음 접하고 머릿속엔 낡은 갱지 책속에 붓글씨로 써내려간 시집 같은 이미지가 각인되었다. 영화는 마치 교과서 속 윤동주의 흑백사진처럼 흑백영화로 제작되었다.
영화는 흑백으로 박제된 윤동주와 송몽규에 숨결을 불어넣어 살게했다. 큰 화면에 펼쳐지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과 시는 가슴을 치게만든다.
윤동주(강하늘 분)와 송몽규(박정민 분)는 한 집에서 태어나 같은 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같은 곳에서 복역하다 숨을 거두었다.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극화한 영화나 드라마는 많지 않았다. 이에 착안한 이준익 감독은 시인의 꿈을 품고 살다 간 윤동주의 청년 시절에 집중했다. 2016년은 윤동주 시인 서거 71주기이기에 ‘동주’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동주’는 윤동주 옆자리 송몽규를 비추며 둘의 관계, 또 이들의 다른 고민 속에 조명을 비춘다. 윤동주에 비해 송몽규를 기억하는 이는 많이 없을 터. 이 같은 감독의 안타까움은 영화에 그대로 녹아있다.
독립운동가 송몽규는 신념으로 가득찬 청년이었다. 누구보다 나라를 위해 고민하고 절망적인 순간 붓 대신 주먹을 쥐고 발로 뛰었다. 몽규는 하루하루 더 독립에 매진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그려진 몽규를 보며 울분이 차오르는 것은 송몽규를 연기한 박정민 뿐이 아닐거다.
윤동주-송몽규, 두 고운 청년은 고작 스물 여덟 살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시를 노래하고자 했던 두 청년은 그렇게 안타깝게, 치열하게 살다갔다. 극 중 윤동주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삭발을 당하는 장면은 역사적 배경과 겹쳐지며 관객들의 가슴에 울분을 터뜨린다. 어찌하고자 해도 어쩔 수 없는 나라의 현실과,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동주와 몽규의 절규일 터.
이 울분과 열정을 강하늘, 박정민이 몸으로 잘 안았다. 두 배우의 연기적 접근법은 참 다르다. 강하늘은 윤동주 그 자체에 집중했다. 그를 만나면 만날수록, 알아갈수록 동주는 대단한 시인이었다. 그렇게 점점 강하늘은 동주가 되어갔다. 박정민은 송몽규의 동기에 집중했다. 그러나 알고자 하면 알 수록 몽규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만큼 박정민이 배역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진지했고, 지극히 학문적이었다. 모순되는 부분에서 해답을 찾으며 전진하는 피나는 노력이 수반되었으리라 짐작한다.
이준익 감독은 상상력이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팩트를 픽션화했다. 그러나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이는 중요치않다. ‘동주’는 흑과 백이라는 두 가지 빚깔로 빚어졌지만, 보기에 따라 무지개빛으로 다가온다. 장면과 장면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의미의 함축은 총천연색 빛깔로 영화를 채색하기에 충분하다.
이이슬 기자 ssmoly6@
뉴스웨이 이이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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