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 대우실업 창업 후 30년 만에 재계 2위 수성외환위기로 해체됐지만 지금도 여전한 ‘대우’ 추억‘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글로벌 기업 시민 ‘예견’장기 해외도피 중 베트남에서 청년사업가 양성 주력
그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곧 그의 경영 신념이자 다가올 ‘글로벌 기업 시민’시대를 일찌감치 내다본 선견지명으로 재계에 족적을 남겼다.
특히 이 저서는 막 경제 성장의 흐름을 타고 부푼 꿈을 꾸던 1990년대 젊은이들에게 유명세를 탔다.
그만큼 대우의 ‘세계 경영’은 파격적이었다. 이는 삼성과 현대를 키운 이병철과 정주영 등 1세대 창업가와 달리 샐러리맨으로 출발한 ‘1.5세대’ 창업가인 김우중 성공신화의 또 다른 원천이었다.
김 전 회장은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세계 경영을 꿈꾼 그의 ‘비상’은 만 30세인 1967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던 중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자본금 500만원에 직원 5명으로 닻을 올린 대우실업은 설립 직후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 수출 실적을 올렸다. 이어 인도네시아와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대우그룹의 뼈대를 세울 종잣돈은 이때 마련됐다. 동남아에서는 김 전 회장을 ‘타이거 킴’으로 부르며 추켜세웠다.
1969년 김 전 회장은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 지사를 세웠다. 1975년에는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 포문을 열어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창구를 자처했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탄생시켰다.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특히 에콰도르(1976년),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에 연이어 진출하는 등 거침없이 대륙을 가리지 않고 해외 사업 터를 닦았다.
당시 김 전 회장은 이들 나라에서 벌어들인 돈을 다시 그 나라에 투자하며 국제적인 신뢰를 쌓아갔다.
특히 그가 아프리카에서 이룬 성공신화는 외교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리비아와 1980년 국교를 수립한 것도 리비아가 인간 김우중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또한 김 전 회장은 대북특사로 활약하며 굳게 닫혀 있던 북한의 문을 여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세계 무대를 확장한 결과 김 전 회장의 대우는 15년 만에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에 이름을 올렸다. 45세 때인 1981년 대우그룹 회장에 오르며 ‘샐러리맨 신화’를 몸소 써내려갔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90년대 동유럽이 몰락하자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 속에 대우’를 몸소 완성해 나갔다.
이를 발판으로 대우그룹은 현대에 이어 재계 서열 2위까지 올라섰다.
1998년말 기준 대우그룹은 해외 네트워크 589곳에 해외고용 인력 15만2000명을 기록했다.
한참 대우그룹이 정점을 달리던 때에 김 전 회장의 연간 해외 체류기간은 280일을 넘긴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거침없던 김 전 회장의 대우그룹도 1997년 11월 외환위기 파고를 넘진 못했다. 누구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위기였고 ‘징기스칸 경영’으로까지 불리던 김 전 회장의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빠져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당시 일본계 증권사에서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라는 보고서가 나온 것을 계기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강조했지만 관료들과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여파로 당시 그룹 구조조정 최우선 사안으로 꼽힌 대우차와 제너럴모터스(GM)의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 한도 제한 조치에 발이 묶여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졌다.
유동성 위기에 빠진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업종·10개사로 줄인다는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며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해체 직전인 1998년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 달러로 당시 한국 총 수출액(1323억 달러)의 14%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런 대우그룹의 해체는 국내 기업 환경과 경제 체질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재탄생했다.
현재에도 사명에 ‘대우’가 들어간 회사로 대우건설, 위니아대우(옛 대우전자), 대우조선해양(옛 대우중공업 조선해양부문), 미래에셋대우(옛 대우증권) 등이 있을 만큼 김 전 회장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가운데 대우조선해양은 현대중공업이 인수를 추진하고 있어 인수 후 ‘대우’라는 이름이 빠질 가능성이 크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 6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 사면됐다.
2014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의 해체를 경제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이라며 ‘기획 해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된 이후에도 대우그룹 공채였던 ‘대우맨’들은 해마다 창립기념일인 3월22일 기념행사를 열었다. 김 전 회장은 2017년 50주년과 지난해 51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지난해 3월 22일 열린 51주년 기념식이 김 전 회장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공식 석상이었다.
말년에 김 전 회장은 베트남을 오가며 미래인재 양성을 위해 ‘글로벌 청년 사업가’ 프로그램을 주도하는 등 후대에 ‘세계 DNA’를 이식하기 위한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7조원에 달한 미납 추징금과 세금을 내지 못하고 1년여 투병 생활 끝에 숙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은 “청년들의 해외진출을 돕는 GY교육사업의 발전적 계승과 함께 연수생들이 현지 취업을 넘어 창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체계화해 달라”고 유지를 남겼다.
뉴스웨이 임정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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