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란 말이 이젠 구시대의 유물처럼 들린다. 취업전쟁이다. 아니 생존 전쟁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전쟁터다. 그 전쟁터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존재하는 정글이다. 약한 놈은 잡아먹힌다. 도태된다. 그럼 죽음이다. 우린 살기 위해 하루하루를 발버둥 친다.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발악을 하는 것이다.
제일F&B 영업2팀 인턴사원 이미례(고아성)는 서울 근교에 혼자 살고 있다. 지방에서 혼자 올라와 서울에서 취직을 꿈꾸며 삶을 위해 발버둥 치는 중이다. 웬만한 시간으론 소화가 힘든 출퇴근 거리에 싼 자취방을 구했다. 지방에 살고 있는 부모님에서 손을 벌리기 싫다. 벌려도 나올 구석조차 없는 뻔한 사정이다. 그러기에 미례는 혼자 일어서고 싶다. 서울이란 환상의 도시에서 꿈을 찾고 싶다. 모든 것이 환상이기에 오히려 꿈이 현실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요원하다. 그는 영업2팀에서 잉여다. 존재감도 없다. 사무실에서 가장 흔한 것이 A4용지다. 있으면 편하지만 없어도 딱히 불편할 것 없는. 필요하면 항상 비품함에 덩어리 뭉치로 대기 중인. 미례는 그런 존재다. 직속선배 염하영(이채은), 이원석(박정민), 대리 정재일(오대환), 대리 홍지선(류현경)은 가끔씩 그를 챙기는 것 같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르다. 열심히 하는 그를 무시한다. 있으면 편하지만 없어도 불편할 것 없는 그런 존재가 이미례다. 점심시간 그의 전화조차 외면하는 그들이다. 쏟아지는 인파 속에서 미례는 앞을 바라보고 뒤를 돌아본다. 여긴 정글이다. 잡혀 먹히면 안 된다. 난 살아야 한다. 난 혼자다.
미례는 살고 싶고 살려고 노력 중이다. 오늘도 이 정글 같은 지옥의 공간(사무실)에서 버티고 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터졌다. 영업2팀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사람으로 대우해주던 김병국(배성우) 과장이 일을 저질렀다. 퇴근 후 집에서 아내와 아들 어머니 등 일가족을 망치로 살해했다. 사무실로 경찰이 찾아왔다. 광역수사대 최종훈 형사(박성웅)란 사람이다. 그가 영업2팀 팀원들을 하나 둘 조사하면서 김 과장의 행적을 수사했다. 마지막 남은 미례에게 관심을 보인다. 정재일 대리는 “젠 인턴이다. 신경 안써도 된다”며 또 다시 잉여취급이다. 하지만 최 형사는 미례를 보고 싶어 한다. 미례는 어쩌면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자신도 정직원 선배들과 같은 취급을 받은 것이다. 자, 이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하나 둘 최 형사에게 펼쳐 보이면 된다. 김병국 과장은 대체 왜 퇴근 후 집에서 일가족을 망치로 무참히 살해 했을까.
이 사건에 대해 영업2팀 김상규 부장(김의성)을 필두로 팀원들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게 미례에겐 문제가 아니다. 당장 인턴 평가에서 탈락 위기다. 눈물 짓는 미례에게 선배 하영은 “너무 열심히 하는 게 문제다”고 꼬집는다.
이런 어수선한 와중에 김병국 과장이 가족을 죽인 뒤 회사로 돌아왔다. 또 김 과장이 돌아온 뒤 영업2팀 직원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죽은 채 발견된다. 하지만 사무실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같다. 같을 것이다. 그리고 같아야 한다. 사라진 동료들은 관심에도 없다. 물론 이미례도 관심 밖이다. 그들은 그저 책상에 앉아서 걱정만 한다. 살려고만 한다. 누구로부터인지는 모른다. 그저 살려고만 한다.
영화 ‘오피스’는 익숙함의 공간,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과 배경 그리고 경험에서 오는 공감의 수치화가 극한으로 치닫는 점층적인 스토리다. 주인공 이미례의 시선으로 바라본 회사의 사무실(오피스)은 이상한 공간이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을 대한다. 이미례는 존재하고 싶어한다. 그래서인지 자신에게 “넌 나와 비슷하다”며 서슬퍼런 도구를 쥐어주려 한 김병국 과장을 뿌리친 이미례인지도 모른다. 사실 김병국 과장도 이미례와 같은 처지였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런 존재. 그래서인지 가족을 죽이고 회사로 돌아왔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팀원들 각자의 눈에만 모습을 잠깐씩 아주 잠깐씩 드러냈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이미례는 불안하다. 자신도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죽는 것보다 조직 안에서 밀려날 것 같은 불안감이 더 크다.
‘오피스’ 속 상황은 극단적이다. 사실 영화적 표현의 장치로 극단성을 선택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치열하고 잔인하고 냉정하다. ‘오피스’가 주는 공포와 스릴의 요소는 이미 우리 사회의 조직이란 괴물이 갖고 있는 아주 작은 단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피스’는 이 바늘구멍보다 작은 ‘단편’의 지점을 밀리미터 단위의 조준으로 정확하게 꿰뚫었다. 이 흔치 않는 꿰뚫림의 정확성이 익숙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와 스릴러 장르의 기본 골격은 어느 순간부터 반전이란 코드에 강박적으로 집착해 왔다. ‘오피스’에도 예상 밖의 반전과 기괴한 상황 속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스토리라인을 전적으로 의지하지는 않는다. ‘오피스’는 공감과 경험이 갖는 현실의 괴물을 살려냈단 점에서 한국영화 속 희대의 장르 영화로 주목받아도 모자람이 없다.
이 영화, 진짜 괴물이다. 다음 달 3일 개봉. 111분. 15세 이상 관람가.
김재범 기자 cine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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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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