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간으로 지난 13일 새벽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백악관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손에는 미리 준비한 반도체 웨이퍼가 들려 있었다.
그가 언급한 ‘어제의 인프라’는 미국이 1990년대 전 세계 반도체 생산의 37%를 점유했던 것으로 읽혔다. 반대로 ‘오늘의 인프라’는 미국의 반도체 생산 점유율이 현재는 12% 수준으로 낮아진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됐다.
여기까지도 명확하고 강한 메시지였는데 그는 멈추지 않았다. 대놓고 “오늘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미국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고 미국의 공급망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말하기 위한 것”이라며 “미국의 경쟁력은 기업들이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달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중국과 세계의 다른 나라는 기다리지 않는 데 미국이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직격탄도 빠트리지 않았다.
이날 회의에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TSMC, 인텔, 마이크론, 글로벌 파운드리 등 전 세계를 주름잡는 19개 기업 임원들이 참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이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 상원의원 23명과 하원의원 42명으로부터 미국을 위한 반도체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초당적 서한을 받았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예상보다 너무도 공격적이고 분명하게 투자를 요구해서 모든 기업이 사실상의 압박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실제로 삼성전자를 포함해 몇몇 기업들은 트위터를 통해 “대화의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다”고 했다.
이틀 뒤인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등 대기업 CEO를 초청해 ‘확대경제장관회의’를 열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전 세계적인 반도체 부족 등 공급망 관련 이슈를 언급하면서 “일본의 수출 규제 당시 소·부·장 대응을 경험해보니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기업과 기업 간이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협력이 기본이었다”며 “기업이 서로 협력하고 정부가 힘을 실어주면 극복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을 향한 일본의 수출 규제와 지금의 전 세계 반도체 패권 경쟁을 동일선에 놓은 것도 의아했거니와 정부가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닌 기업이 움직여주면 뒷받침해주겠다는 다소 소극적인 메시지로 읽혔다.
게다가 이날 회의 모두 발언에서도 문 대통령은 “우리 반도체가 9개월 연속 수출 증가를 이루며 세계 1위의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라는 자화자찬은 남겼지만 그 어디에서도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하는 기업 현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반도체 업계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도통 정부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타이밍이 늦은 데다가 구체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등의 뒷말이 계속됐다.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 합리적인 추론을 내놓는 시각도 나왔다. ①문 대통령 미국과 중국을 직접 언급하면 자칫 외교적인 사안이 될 수 있어 조심했을 것 ②공개되지 않은 자리에선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대책이나 대화가 오갔을 것 ③기업에 모든 역할과 권한이 있으니 먼저 움직이면 그에 따른 지원을 해주겠다는 것 등이다.
명확한 요구와 두루뭉술한 훈수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을까.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자신감과 한국이라는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한 신중함이라도 녹아 있는 것일까.
확실한 건 지금과 같은 미국발 반도체 패권 전쟁은 2018년 미·중 무역분쟁이 선명해지면서 확대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도체 기업들 사이에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는 호소가 가득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정부가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줬으면 좋겠다는 불만도 끊이지 않았다.
언젠가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정부가 이 정도로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건 조심스러움보다는 아예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이해 부족이나 이해하기 위한 노력 부족 아닌가 싶다”고 뾰족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
발단, 전개, 위기를 거쳐 절정까지 치달은 3년여의 시간 동안 기업들의 줄타기는 계속되고 있고 정부의 참전 없는 훈수도 지속 중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6월 안으로 ‘K반도체 벨트 전략’을 내놓겠다고 했다. 기업들은 이번엔 훈수가 아닌 묘수가 나오거나 최소한 명쾌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재차 기대를 걸고 있다.
뉴스웨이 임정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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