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만 10조 8000억원 유동성 공급···사실상 기준금리 인하원화 가치 하락 가속화···안정 궤도 오른 물가도 자극전문가 "한은 실책" vs "현 상황서 불가피한 결정"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은은 변동성이 높아진 금융·외환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내년 2월 28일까지 한시적으로 비 정례 RP를 매입할 방침이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이 확산된 2020년 3월 이후 약 4년 만이다.
한은은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다음날인 지난 4일 10조8100억원에 달하는 RP를 매입했다. 한은은 우선 이날부터 향후 14일간 약 151조원 규모의 유동성을 RP 매입으로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유동성 공급은 시장 수요에 맞춰 충분히 늘려갈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무제한'이라는 게 한은의 설명이다.
한은이 시장에 대규모 유동성을 공급하기로 한 배경으로는 국고채 금리 안정이 첫손에 꼽힌다. 계엄 사태 이후 수요가 떨어진 국고채의 금리 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대규모 유동성을 공급하게 됐다는 얘기다.
비상계엄 선포 다음 날인 지난 4일 서울 채권시장에서 국고채 금리(3년 만기)는 전 거래일 대비 4.1bp 상승한 연 2.626%에 마감했다. 국고채 금리가 오를수록 정부의 이자 상환 부담이 확대돼 재정 여력이 악화되고, 회사채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온 기업들도 돈줄이 막힐 우려가 있다.
문제는 한은의 '무제한 유동성 공급'이 환율과 물가 상승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은의 대규모 RP 매입은 사실상 추가적인 금리인하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원·달러 환율은 최근 7거래일 연속 1400원 선을 웃돌고 있고, 1450원 돌파는 시간 문제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최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환율과 관련해 "당분간 예전 수준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언급한 바 있다.
김상봉 한성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한은이 시중에 돈을 많이 풀면 그만큼 화폐 가치는 더 떨어지게 된다"며 "정치적 리스크 대응에 따른 유동성 공급은 이해하지만, 가뜩이나 원·달러 환율이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코로나19 확산 때처럼 유동성을 지나치게 풀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재 환율이 1200~1300대 선으로 형성돼야 하지만 이보다 10% 이상 높아져 있는 상황"이라며 "달러 수요가 높아 환율이 급등하고 있는데도 시장에 관한 시그널을 준 것"이라고 부연했다.
일각에선 한은이 금융 안정과 물가안정이라는 핵심 정책목표를 외면한 '실책'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환율과 물가를 고려하지 않은 판단을 내리고도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지용 상명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환율이 높아지면서 생산원가가 상승과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있는데, 한은이 RP 매입을 늘리면 인플레이션 압력을 더욱 키우는 악순환이 우려된다"며 "기준금리 추가 인하로 환율 상승에 일조했던 한은의 실책"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우리나라는 이미 환율 관찰국인데 정부가 자꾸 개입하게 되면 환율조작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원·달러 환율이 1450원을 돌파하면 기업들의 환차손이 확대되고 국내 내수경기 악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은의 통화정책 실패로 내년 상반기 경제성장률은 1.5%를 밑돌 수도 있다는 게 서 교수의 생각이다.
다만 한은의 무제한 RP 매입은 불안정한 외환·금융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있다. 일단 급한 불을 끈 후 시장에 풀었던 돈을 거둬들여도 늦지 않다는 얘기다.
전성인 홍익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과거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길고 뭉뚝한 바늘이 오랫동안 경제를 짓누른 것이라면 계엄 사태는 짧고 뾰족한 바늘"이라며 "유동성을 풀면 원화 가치가 떨어지지만 지금은 정치적 불확실성이 워낙 크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시장 안정 조치를 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유동성을 무제한으로 풀겠다고 했지만 실제 공급 규모는 크지 않을 수 있고, (넉넉한 외환보유고로) 시장을 안심시키는 목적이 크다고 본다"며 "일단 탄핵정국이 빠르게 마무리돼야 금융시장에서 예측할 수 있는 시계가 돌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뉴스웨이 박경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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