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개봉한 ‘신의 한 수’가 27일 기준 345만명을 동원했다.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수상한 그녀’ ‘역린’에 이어 3번째 최다관객 동원작이다. 개봉 한 달이 다되는 시점에서도 하루 평균 2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 중이다. 바둑이란 낯선 소재와 액션이란 익숙한 장르의 결합도 눈길을 끈다. 배우 정우성 이범수 안성기 이시영 안길강 최진혁 등 걸출한 신구 세대 배우들이 조화를 이뤘다. 영화 ‘퀵’으로 상업적 센스를 발휘한 조범구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흥행 요소는 완벽하게 갖춘 셈이다. 하지만 그 요소에 방점은 배우 김인권이 담당했다. 그는 영화에서 시종일관 떠벌이는 속사포 대사로 관객들의 혼을 빼놓았다. 배역도 ‘꽁수’란 이름이다. 처음부터 그를 위해서 준비된 역할 같다.
“조범구 감독님과 ‘퀵’에서 인연이 됐어요. 시나리오를 주시는 데 ‘바둑’이라 ‘어?’했죠. 낯설고 우선 제가 바둑을 몰라요(웃음). 그런데 제가 읽는데도 재미가 있더라구요. 절 기억해 주시고 시나리오를 건내주신 감독님이 젤 고맙죠. 사실 전작 ‘퀵’에서도 좀 아쉬운 부분이 있었죠. 그래서 저나 감독님이나 좀 이를 악다문게 있었죠. 다행히 결과가 너무 좋아서(웃음)”
그는 영화에서 생계형 바둑 고수로 나온다. ‘신의 한 수’와 비슷한 포맷으로 불리는 ‘타짜’의 ‘고광렬’(유해진)을 생각하면 된다. 캐릭터도 그렇지만 김인권 역시 자신을 완벽한 생계형 배우라고 소개한다. 그 점을 그는 결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부분을 알고 있고, 그래서 다른 것을 넘보지 않고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의 범위 안에서 마음껏 놀고 있다. 그게 어쩌면 김인권 효과의 첫 번째 동력이다.
“뭐 고민은 매번 하죠. 캐릭터를 어떻게 살릴까. 혹은 스토리의 흐름을 어떻게 이어갈까 등등? 제가 할 고민은 그게 아니에요. 전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즐거울 수 있을까’ ‘어떻게 이 부분에서 주연 배우들을 받쳐줄까’ 등등이에요. 그 점에 힘을 쏟으면 관객들의 마음은 저절로 오게 되더라구요. 아닌가요(웃음)”
그는 받쳐준다는 말을 자주했다. 스스로를 조연 혹은 주변으로 낮췄다. 1000만 영화를 세 편이나 필모그래피에 올린 배우로서 겸손이 지나치다고 눈을 흘겼지만 김인권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항상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고 나중에도 그럴 것이라고.
“전 관객의 집중을 돕기 위해 참여하는 양념 같은 배우에요. 그 역할을 못하면 제가 참여할 이유가 전혀 없죠. 제가 경박하고 가벼운 분위기로 마구 뒤흔들고 밑밥을 깔아 드려야 우성이형이나 안성기 선생님 범수 형님 등이 그 위에 가볍게 올라오시죠. 전 이번 영화에서 분명하게 그런 역할이었고, 제가 그걸 원했고, 감독님도 저의 그런 모습을 원했을 거에요. ‘퀵’에서 조금 모자랐던 부분을 이번에 감독님이나 저나 한 번 의기투합해 끝까지 끌어 올려보자 했죠. 다른 선배님들과는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저하고는 그랬어요. 정말 그 부분에선 집중을 많이 했습니다.”
그가 연기한 배역은 ‘꽁수’다. ‘꽁수’를 연기하면서 집중한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캐릭터로서의 존재감과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었다. 프로 배우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눈치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존재감과 자존심을 버리는 작업은 사실 납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김인권은 ‘꽁수를 살리는 방법이 그것이었다’고 말했다.
“너무 까불고 수다말 떨 경우 가벼운 배우로 인식이 박힐까란 우려는 했어요. 하지만 각오했던 부분이구요. 그래서 이왕 할거 확실하게 하자고 다짐했죠. 어설프면 안하는것 보다 못하잖아요. 그런데 ‘신의 한 수’ 속 얘기에서 ‘꽁수’는 그래야 했어요. 그게 이 영화의 엔진을 움직이게 하는 일종의 윤활유라고 생각했어요. 눈에 보이지 않고 쉽게 잊혀지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쉽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임했죠.”
결국 김인권의 그런 선택은 ‘신의 한 수’를 통해 스스로가 발견하게 된 최고의 장점이 됐다. 데뷔 15년 차 관록의 배우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아니 원래 김인권은 가볍고 까불거리는 사람이지만 그 밑바탕에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겸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인물이고 배우였다.
“주연이요? 저도 ‘방가방가’ ‘강철대오’ ‘전국노래자랑’ 등 꽤 잘된 영화들 3편이나 했어요(웃음). 그런데 이 영화를 하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배웠죠. 제가 우성 형처럼 그런 멋을 낼 수 있을까. 절대 아니죠. 안성기 선생님처럼 내공을 보일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에요. 작품에 맞는 역할 속에서 그 역할이 갖는 힘이 무엇인지 파악을 할 수 있었고, 그 역할을 하면서 다른 배역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배운 것 같아요. 정말 저에겐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됐죠.”
사실 김인권이란 배우는 가벼움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던 시절이 있었다. 데뷔작 ‘송어’의 강렬함, 느와르 영화 ‘숙명’에서의 살벌함, ‘마이웨이’에서의 다층적 감정 연기 등은 김인권의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단적인 필모그래피에 불과하다. 대학에선 놀랍게도 연출을 전공했다. 졸업작품 ‘쉬브스키’는 그가 각본과 연출 주연까지 겸한 1인 3역을 소화한 작품이다.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도 받았다.
“한때 이쪽 일을 그만 둘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때 얘기하자면 3박 4일도 모자라요. 정말 그만 둘까 생각하면서 진지하게 이것저것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죠. 그때 설경구 선배가 느닷없이 전화를 해주셨죠. ‘윤제균 감독 아냐’라고 물은 뒤 빨리 오라고. 그게 ‘해운대’에 출연하게 된 계기에요. 정말 고마운 두 분이죠. 사력을 다해 달려들었죠. 그리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하루하루가 너무 고맙죠.”
영화 ‘숙명’을 찍고 나서였단다. 당시 영화에서 너무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기에 주변에서 그를 보면 슬금슬금 피했다고. 실제 지인과 음식점에 갔다가 그곳에 있던 모든 손님들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던 일화도 있었다고. 그때는 자신의 연기에 대한 강약 조절을 잘 몰랐단다.
“그냥 끝과 끝으로만 갔던 시절이었어요. 너무 강하던가 너무 가볍던가. ‘숙명’을 끝내고 너무 정체기가 길었는데 ‘해운대’ 윤제균 감독님이 ‘너 연기, 진짜 비호감인거 아냐’고 하시더라구요(웃음). 그때 제 톤을 많이 잡아주셨죠. 그동안 배우는 관객들에게 각인만 돼야 하고, 이른바 ‘따먹는 신’을 잘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어요. 어떤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해운대’가 그걸 깨준 첫 작품이에요.”
그는 ‘신의 한 수’를 하면서 한 가지 더 얻은 게 있단다. 데뷔 15년에 접어든 프로 중에 프로인 그가 누군가를 롤 모델로 삼게 된 것이다. 바로 영화에서 악역 ‘살수’로 등장하는 이범수다. 주변에서 그에게 ‘이범수와 같은 배우가 되라’는 말을 많이 해줬다고.
“진짜 멋진 선배님 같아요. 코미디면 코미디, 드라마면 드라마, 액션이면 액션, 장르를 가리지 않으시고 팔색조처럼 변하세요. 이번에는 너무도 멋진 악역으로 나오시잖아요. 그렇게 다양한 장르에 나오시면서 중요한 것은 힘을 전혀 주시지 않는다는 거죠. 정말 많은 걸 배웠고, 앞으로 그분처럼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제가 우성 형처럼 될 수는 없잖아요. 하하하.”
김인권은 오는 9월 추석 시즌 개봉을 앞둔 ‘타짜-신의 손’에서 또 다른 도박꾼으로 출연한다. ‘신의 한 수’와는 분명히 다른 톤이다. 이후 전설적인 포크그룹의 실화를 그린 ‘쎄시봉’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데뷔 15년이 지난 김인권은 아직도 진화 중이다. 그래서 충무로에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김인권 효과’가 말이다.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cine517@newsway.co.kr
저작권자 © 온라인 경제미디어 뉴스웨이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