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는 한국 경제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대기업 창업자들부터 미래를 짊어진 스타트업 CEO까지를 고루 조망합니다. 이들의 삶과 철학이 현직 기업인은 물론 창업을 준비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내 최초의 신약이자 양약인 활명수를 만든 사람은 ‘동화약방’의 은포 민강 초대사장과 그의 부친인 노천 민병호 선생입니다. 두 사람은 궁중의 한의학적 비방에 서양의학을 더해 활명수를 개발했습니다.
활명수는 현재 시세로 따지면 2만원에 가까운 비싼 가격에도 제대로 된 치료제가 없었던 급체와 토사곽란을 해결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됩니다.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
활명수가 인기를 얻자 여기저기에서 유사품이 쏟아졌습니다. 이에 민 사장은 국내 최초로 상표등록을 합니다.
동화약방과 부채표. 활명수는 1996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제약회사, 최초 등록상표와 상품 등 4개 부문에 걸쳐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민 사장은 약을 만들어 파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활명수가 인기몰이에 한창이던 시기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압 통치를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민족의 미래를 걱정했던 민 사장은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지요.
이에 민 사장은 소의학교를 세우고, 서울약학교 설립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나아가 그는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는데요. 민 사장은 활명수로 벌어들인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합니다.
민 사장은 자금 지원뿐만 아니라 독립투사로 직접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비밀결사대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나섰는가 하면,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지요.
동화약방 또한 약방 그 이상의 기능을 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를 잇는 ‘서울연통부’의 비밀연락 거점으로 활용된 것.
민족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이토록 힘을 썼던 민 사장은 결국 1921년 일본의 감시망에 걸려 1년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모진 옥살이도 민 사장의 독립을 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는데요.
민 사장은 출옥 후에도 상하이로 건너가 민족교육과 계몽에 힘썼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동화약방은 기울어 가고 마는데요. 결국 민 사장은 동화약방의 재기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동화약방을 운영하면서 이전보다 더 항일운동에 매진하게 된 민 사장은 1924년 또다시 체포됐고, 모진 옥살이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1931년 별세하고 맙니다.
민강 사장의 별세 이후 동화약방도 위기를 맞게 되는데요. 1937년 독립운동가이자 경영 전문가인 보당 윤창식 선생이 인수하면서 다시 살아났고, 동화약품으로 이름을 바꾸며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이렇듯 동화약품과 활명수가 12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국민들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신인 동화약방이 민족을 우선으로 생각한 민강 창업사장의 가치 아래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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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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