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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유효한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대우그룹 50돌]여전히 유효한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등록 2017.03.21 07:16

김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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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이병철과 함께 창업 1세대 주역타고난 비즈니스 감각 글로벌 기업 키워90년대부터 이미 해외진출 중요성 강조功過 분명하지만 ‘글로벌 시대’ 선견 평가도

지난 2014년 열린 ‘제45회 대우특별포럼-김우중과의 대화’ 행사에 참석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김동민 기자 life@newsway.co.kr지난 2014년 열린 ‘제45회 대우특별포럼-김우중과의 대화’ 행사에 참석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김동민 기자 life@newsway.co.kr

‘대우 신화’를 이끈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작고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함께 한국 재벌의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김 전 회장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유지하는 쪽에서도 그가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기업가정신의 화신이었다는 평가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1967년 32세의 나이에 직원 5명,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설립한 김 전 회장은 창립 5년만인 1972년 국내 기업 중 수출 2위에 오르는 등 70년대에 이미 1억불의 수출탑을 달성하며 신흥재벌로 우뚝섰다. 74년 대우전자 설립 이후 한국기계공업 인수, 대우중공업 출범, 새한자동차 인수, 대우조선공업 설립 등 초고속 성장으로 당시 권력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총애를 독차지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의 리더십은 80년대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대우 출범과 함께 대우자동차 출범, 가전사업 진출 등 승승장구하던 대우는 세계로 눈을 돌려 미국 등 서구는 물론 동남아시아와 옛 구소련 국가에도 현지법인을 설립하며 신시장 개척에 나선 것이다.

김 전 회장은 타고난 비즈니스 감각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해외진출을 그룹이 나가야 할 방향으로 설정했다. 89년 발간한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해외사업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내보인 그는 93년 ‘세계경영’을 공식 선포하고 해외사업체 설립에 온 힘을 쏟았다.

이후 대우그룹 전 계열사는 세계경영을 모토로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했다. ㈜대우가 구축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선진국 뿐 아니라 90년대 초반 개혁·개방을 시작한 동구권 국가, 발전초기의 개발도상국까지 지역과 환경을 가리지 않았다.

김우중 전 회장은 소유를 목적으로 하는 현재의 사업가들에게 성취를 추구하는 ‘기업가 정신’을 강조한 인물로 유명하다. 1년중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면서도 끊임없이 공장을 둘러보고 임직원들을 독려하는 그의 모습은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귀감이 됐다.

대우그룹이 몰락한지 십수년이 흘렀음에도 세계 곳곳에 대우 브랜드가 건재한 것 또한 당시 김 전 회장이 흘린 땀의 결과물이다. 특히 지금의 신흥국이 새로운 시장으로 등장하기 이전부터 발전 가능성을 눈여겨본 선구안은 “시대를 너무 일찍 살았다”는 평가를 동의하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일각에서는 인수합병(M&A)을 기반으로 한 지나친 차입경영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대우그룹의 몰락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경영여건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M&A를 통한 외형확대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정작 유동성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이는 수치상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93년 당시 150여개에 불과하던 대우의 현지 해외법인은 5년뒤 396개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자산규모 역시 15조원 수준에서 98년 72조원으로 5배 가량 급증했다.

단순하게 보면 외견상 뛰어난 영업실적을 바탕으로 외형 확대에 성공한 듯 보인다. 하지만 재무제표상에는 영업이익 뿐 아니라 부채도 자산에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당시 대우그룹은 국내총생산(GDP)의 14%를 차지하는 재계서열 2위의 대기업이 아닌 현금순환이 전혀 없는 부실자산을 담보로 한 거대부실기업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99년 대우그룹의 부채비율이 400%를 넘어서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김우중 전 회장은 4월 고강도 구조조정안을 발표하며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대우중공업 등 핵심계열사를 포기하고 ㈜대우와 대우자동차 등 일부계열사만 묶인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변신하겠다고 밝힌 2차 구조조정안을 내놓은 것이다.

이 같은 노력에도 당시 채권단은 김 전 회장이 제시한 구조조정안을 반려했다. 결국 대우그룹은 채권단과 재무구조개선수정약정 체결과 더불어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1967년 창업 이후 32년간 지속된 그룹이 해체의 길로 접어들게 되면서 화려했던 ‘김우중 신화’ 역시 그대로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대우그룹의 명암과 관계 없이 김우중 전 회장이 주창한 ‘세계경영’은 21세기 한국 경제를 정확히 예언한 성장전략이었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세계시장 진출은 이제 모든 기업의 목표가 됐으며 선진국 뿐 아니라 신흥개발국에서도 해외브랜드와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중이다.

이는 저성장 기조로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 한국경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미 이뤄낸 결과에 만족하기보다는 또 다른 성과를 거두기 위해 노력한 김우중의 ‘기업가 정신’이 지금 필요한 이유다.

뉴스웨이 김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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