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리면 아프지만 아픈걸 알면서도 만지게 되는 묘한 감정의 흡인력, 그리고 살 속에 박힌 것을 빼려 들면 들수록 더욱 깊게 박히는 ‘가시’의 속성은 장르적 영화 속성인 스릴러의 그것을 쏙 빼닮아 있다. 꽤 그럴듯한 아니 기본 콘셉트 자체에선 ‘불륜’이란 코드까지 가져오며 딱 맞아 떨어지는 모양새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렇다. 훔쳐 먹는 사과가 더 맛있다고, 사랑도 그렇고 그 사랑의 치명적 결과가 어떤 파국을 일으키는지 ‘가시’는 제목의 그것처럼 깊숙이 파고드는 아픔의 모양새를 통해 모두가 피해자로 남는 예측 가능한 전개로 흘러갔으면 했다. ‘가시’는 그렇게 흘러갔어야 했다.
예측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시’의 그런 전개는 이미 수 없이 반복됐던 얘기다. 아내 혹은 남편을 둔 다른 사람과의 정신적 육체적 관계, 그리고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한 상대방의 집착 그것이 가져온 종국의 결말. 수 없이 반복된 클리셰다. 이런 스토리는 지겨울 법도 하건만 계속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일종의 ‘관음’과 ‘일탈’을 건드리는 코드이기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시’ 역시 그럴까. 최근 장르의 이종교배가 유행처럼 번지는 상황에서 ‘가시’도 스릴러와 서스펜스 그리고 에로티즘을 넘나드는 시도를 한다. 결과는 이 맛도 저 맛도 그 맛도 아닌 ‘관객 모독’ 수준이 됐다. 기본적으로 캐릭터를 해석하는 배우들의 능력자체가 의문을 넘어 허탈함을 연발하게 만든다. 납득키 힘든 스토리 전개의 원인 최우선이 거기에 있다.
주인공 준기(장혁)는 자신이 교사로 있는 학교 여고생 영은(조보아)에게 순간의 감정을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준기의 모습은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나약한 인물이다. 처가 식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동서와의 대화에서도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힘없는 모습이다. 장인의 배경을 통해 얻은 일자리(여고 체육교사)에서도 적응을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치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영화의 주제가 사랑이기에 진짜 사랑 혹은 순간의 탐욕(섹스)을 갈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해 불가능은 아내(선우선)와의 관계는 원만하다. 임신한 아내를 위해 겉으론 가정적인 남편으로의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아내에게도 무언가를 숨기는 듯하다. 자신의 일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준기는 공교롭게도 남성성의 상징인 전직 럭비선수다. 저돌적이고 강렬한 부딪침이 플레이 자체인 럭비 선수가 일상에선 부적응 장애를 앓는 듯한 모습은 결코 납득하기 힘들다. 아니 영화적으로 트릭이자 전개 방식으로 짚고 넘어가자. 대체 준기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관객들은 그의 감정과 행동을 따라가는 데 맥이 빠지고 힘이 떨어진다. 옴므파탈, 나쁜 남자, 혹은 육체적 관계, 플라토닉 러브 등을 추구하는 여러 남성 캐릭터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준기는 그저 영은과 아내의 틈바구니에서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그렇다고 다른 무엇도 아닌 그냥 영은을 위해 존재하고 아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등장하는 겉돌기 캐릭터다.
영은에게 처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불명확하고, 학교에서 벌어진 첫 번째 일탈 과정이 실제 남녀관계(설사 사제지간의 불륜이라고 해도) 일반 성인 관객들에게 다른 의미의 ‘사랑’(혹은 가시)으로 전달되기에는 무리가 아닌 그저 장면의 연속성으로만 전달될 뿐이다. 한 마디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노력도 과정도 없다.
준기의 아내 서연(선우선)의 급격한 감정 변화는 실소를 머금게 한다. 영화 중반 이후까지 남편 준기에게 노골적으로 감정 표현을 하는 영은을 두둔하며 감정 장애를 일으키는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기혼 여성들의 눈치가 이 정도라면 아마도 현재 대한민국은 우스갯소리로 불륜 공화국이 됐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관객의 진을 바닥까지 소비시킨 어느 시점에서 서연은 영은과 준기의 관계를 의심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반응은 이렇다. 여고생과 30대 교사의 육체적 불륜 관계를 의심하는 아내의 화살이 과연 어디로 향할까. 서연의 화살은 오롯이 영은에게로만 쏟아진다. 끝까지 남편 준기를 믿는다. 글쎄 이런 부정확한 관계의 어그러짐을 우려한 듯 영화는 준기-서연 부부의 아이를 희생양으로 서연의 감정 폭발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은 영은이다. 여고생이란 캐릭터는 순수함이 전제돼야 하는 배역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해도 도발적이고 갑작스런 사랑의 위험성을 얘기하는 스토리에서 여고생은 분명 스토리의 무게와 방향성을 가리키는 방향타가 돼야 한다. 하지만 ‘가시’ 속 영은은 스토리의 도발성이 아닌 캐릭터의 도발적 매력으로만 채워진 보기 민망한 배역으로 변질됐다. 초반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준기의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는 영은의 모습은 그렇다 치더라도 극이 전개될수록 몸을 던지는 여고생의 유혹은 영화란 매체 속에서 이해하기에는 그 범주가 넘어선다. 분명히 다른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준기로 하여금 빠져들 수밖에 없는 영은의 매력을 찾아내고, 영은 역시 풍기는 꽃의 향기처럼 준기를 끌어당기는 매력을 발산했어야 한다. 하지만 두 캐릭터는 관객들에게 강요만 한다. ‘이렇게 하는 데 넘어오지 않겠어’ ‘이러는 데 내가 안넘어가’ 이런 시선은 관객들을 기만하는 자만심이다. 단 한 장면, 영은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인물이란 설명이 뜬 구름을 잡듯 한 번 스치고 지나간다. 차라리 그 뜬구름을 좀 더 명확하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설득했다면 앞선 두 인물의 허무맹랑함이라도 채워질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말이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세 캐릭터의 연기가 좁은 컵 속에 떠 있는 기름때처럼 따로 떠다닌다. 물을 쏟아냈지만 그 기름때는 컵 속에 늘러 붙어 닦이지도 않는다. 주둥이가 그리 크지 않은 컵은 설거지를 하기에도 불편한 감이 크다. 영화 ‘가시’가 딱 그렇다.
말하고픈 주제는 확실하다. 그러면 그 주제를 설득해야 하는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력이 분명히 있어야 했다. ‘가시’는 이미 주제의 흐름이 명확한 스토리다. 결국 이미 갈 길이 정해진 곳을 그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들이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맨 꼴이 되고 말았다. 대체 117분의 러닝타임이 지난 뒤 어느 누가 ‘가시’를 ‘심장을 파고드는 잔혹한 집착’으로 보겠나.
이중 장르가 적절히 뒤섞인 ‘가시’의 가장 큰 패착은 배우들의 초보적 캐릭터 해석력이다. 결국 각각의 인물이 산으로 흘러가면서 연기는 깊은 수렁으로 빠진 채 허우적대는 꼴이 됐다. 불분명한 장르의 낯설음을 지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마저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게 배우들의 호연이다. ‘가시’가 이중 장르 교배와 배우 연기 악평의 대표 실패작으로 거론될 만한 이유다.
김재범 기자 cine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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