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는 한국 경제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대기업 창업자들부터 미래를 짊어진 스타트업 CEO까지를 고루 조망합니다. 이들의 삶과 철학이 현직 기업인은 물론 창업을 준비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천한 일로 번 돈이라도 보람 있게 쓰란 뜻의 유명한 속담입니다. 누구나 알지만 실천이 어려운 말이기도 하지요. 여기, 자신의 생을 통해 정승 같이 쓰는 게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기업가가 있습니다.
바로 동국제강의 창업자인 장경호 회장입니다. 실제로 장 회장은 돈을 쓰는 건 물론 버는 것 역시 이른바 ‘정승’ 같았던 기업인으로 회자되곤 하는데요. 과연 어떻게 벌고 어떻게 썼을까요?
1899년생인 장 회장,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14세 때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합니다. 일본의 횡포에 분노와 서글픔을 느끼며 자라온 그는 19세 졸업과 동시에 3·1운동에 참여합니다.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 들어간 청년기의 장 회장. 수사를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요. 1년여 간 선진 문물을 접하면서 조국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경제 부흥’에의 일조라고 결심하게 됩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장 회장은 형의 미곡 일 등을 도우며 약 10년 간 사업 경험을 쌓았습니다. 1926년엔 본인의 첫 회사 ‘대궁양행’을 세우고 쌀가마니를 수집해 파는 사업을 시작합니다. 가난한 농민들의 사정을 잘 알기에 가마니 값은 늘 제대로 쳤지요.
1935년부터는 부산 광복동에 ‘남선물산’을 설립, 가마니 공장 외에 미곡사업과 정미소, 수산물 도매, 석유 깡통을 만드는 제조업에도 착수하며 사업 확장에 나섰습니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분야였고, 회사는 성장합니다.
‘철’과의 인연은 1949년에 시작되지요. 거래 중인 재일교포로부터 철사를 뽑아내는 ‘신선기’를 인수한 것이 계기. 남들이 가지 않은 길로 가는 걸 즐겼기에 완전히 새로운 분야임에도 걱정보단 집념·열정이 앞섰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엔 복구와 재도약의 물결이 필요했습니다. 장경호 회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은 철사와 못을 필사적으로 생산했고, 이것들은 복구 현장에서 하드웨어적 기반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집념으로 불모의 갯벌을 메워라.” - 장경호 회장
실제로 우리나라 민간 철강업계의 활약은 동국제강을 통해 본격화됐습니다. 동국제강 제품은 근대화가 이뤄지는 곳곳에서 밑거름 역할을 하지요. 동국제강과 장 회장이 산업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기업 및 기업가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조국과 함께 아파하고 또 성장했던 장 회장. 이처럼 돈을 버는 것부터 ‘정승급’이었는데요. ‘근검절약’과 ‘부의 사회 환원’으로 구분되는 그의 씀씀이는 정도가 더했습니다.
장 회장의 근검절약에 관해 당시 한 언론은 이렇게 기록한 바 있습니다..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음은 물론 육식조차 하지 않을 만큼 절제된 생활을 했다. 재벌 총수답지 않게 허름한 구옥에 기거하면서 선풍기 바람을 즐겼고 환갑잔치마저 만류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 매일경제신문 1975년 9월 10일자 기사 中
돈에 대한 그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일화는 재산의 사회 환원이지요. 동국제강이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75년, 장 회장은 ‘자아를 발견하고 세상에 낙원을 이룩한다’는 좌우명대로 사유재산 30억 원을 국가에 헌납합니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얻은 이익은 다시 사회의 공익을 위해 환원해야 한다.” - 장경호 회장
눈에 보이는 화려함보다 정신적으로 고귀한 가치를 좇았던 진정한 기업인으로 회자되는 까닭입니다.
“돈은 왜 버는지 아느냐? 좋은 데 쓰려고 버는 거다. 그걸 누가,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삶의 보람이 달라진다.” - 장경호 회장. 손자들에게
정승처럼 벌어 정승 같이 쓴 장경호 회장. 부자에 관한 부정적 인식이 만연한 시대, 그의 발자취는 기업가들이 계승해 마땅한 정신적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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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이성인 기자
silee@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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