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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빈약했던 중국차, 이제는 위협

전문가 칼럼 권용주 권용주의 모빌리티쿠스

빈약했던 중국차, 이제는 위협

등록 2024.07.01 06:00

수정 2024.07.01 08:32

빈약했던 중국차, 이제는 위협 기사의 사진

1886년 벤츠 1호차가 등장했을 때 미국 오하이오주에선 산업 박람회가 열렸다. 이때 전시된 휘발유 엔진을 보고 자동차 제작을 마음 먹은 사람은 미국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를 만든 찰스 에드가 듀리에(Charles Edgar Duryea, 1861~1938)다. 가솔린 내연기관에서 영감을 얻은 찰스는 곧바로 자동차를 설계했고 동생인 제임스는 제작과 시험을 담당했다. 1893년 듀리에자동차는 미국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 도로 시험을 했고 이 광경이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그리고 1895년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 최초의 자동차경주에서 제임스는 우승을 차지해 주목을 받았다. 그 이후 듀리에자동차를 찾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1896년 13대를 생산했다. 하지만 형제 간의 불화로 제임스는 총기 제작으로 돌아섰고 찰스는 1917년 후반까지 듀리에자동차를 생산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결국 문을 닫았다.

그런데 찰스 듀리에가 미국에서 한창 자동차를 만들던 1902년 중국 청나라에 듀리에자동차 한 대가 등장했다. 권력을 틀어쥔 서태후의 66번째 생일을 맞아 위안스카이가 선물한 중국 최초의 자동차다. 역사에는 1893년 듀리에자동차가 만든 차로 기록돼 있는데 1893년은 듀리에자동차가 도로 시험을 하던 때였던 만큼 시험차 중의 한 대가 중국에 보냈졌다는 얘기다.

이후 개항지였던 홍콩과 마카오를 통해 유럽산 자동차가 속속 중국으로 들어가자 중국 또한 자동차 산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1930년대 중일전쟁 당시 일본 자동차부대의 활약상은 산업 참여 욕망을 더욱 높인 계기가 됐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공산화의 격동 속에서 중국의 자동차 산업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나마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소련제 군용차 생산이 고작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독자적인 생산 노력은 지속됐다. 1956년 7월, 중국의 제일자동차(FAW)는 '해방'이라는 트럭 제품을 출시했다. 중국 최초의 자체 개발 트럭으로 엄청난 시선을 끌었다.

또한 상하이양포국의 후신인 창안자동차도 1959년 창장 46형을 만들었고 동시에 일본 스즈키 경차를 판매하기도 했다. 이후 1980년대까지 중국은 자동차의 변방이었고 낙후된 기술로 세계 시장 진출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대부분 국영 또는 지방정부 소속으로 자동차기업이 여럿 설립됐지만 기술 수준은 매우 떨어졌다.

이때 중국 자동차산업을 키우겠다고 각오를 다진 이가 덩샤오핑이다. 1978년 '개혁개방, 흑묘백묘'를 내세운 그는 일본과 평화우호조약을 맺으며 일본의 여러 제조업을 둘러봤다. 그리고 토요타자동차에 중국 진출을 요청했다.

하지만 토요타는 중국의 시장 규모가 작고 미국에 집중하던 때여서 덩샤오핑의 요청을 거절했다. 귀국 후 자존심이 상한 덩샤오핑은 앞으로 30년 동안 중국 대륙에서 토요타자동차를 만들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중국 정부 내에서 토요타는 일종의 금기어로 자리 잡게 된다.

토요타가 머뭇거릴 때 틈새를 비집은 곳은 독일 폭스바겐이다. 1985년 해외 자동차 기업 중에선 가장 먼저 진출해 상하이자동차와 손잡았다. 첫 생산 제품으로 '싼타나(Santana)'를 내놓으며 중국인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1990년에는 제일자동차(FAW)와 함께 별도 회사를 차려 또 다른 폭스바겐 제품을 생산, 판매했다.

결국 토요타 또한 2002년에 중국에 진출했는데 덩샤오핑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토요타가 중국 내 국민차 대열에 오를 수 있었던 셈이다. 이후 폭스바겐의 성공을 본 현대차도 토요타와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 진출해 급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그 사이 중국은 배터리 전기차(BEV)로 시선을 돌렸다. 대표적으로 휴대전화 배터리를 만들던 BYD는 2003년 파산 직전의 내연기관 자동차회사를 인수하고 곧바로 전기차로 돌아섰다. 내연기관으로는 결코 해외 기업과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탓이다. 그러자 중국 정부도 2012년 전기차는 중국의 해외 진출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전기차 산업 육성책을 내놨다.

덕분에 중국 내 수많은 자동차기업 또한 전기차 개발에 속속 뛰어들며 규모를 키워나갔고 이제는 BYD보다 먼저 전기차에 뛰어든 미국의 테슬라마저 위협한다.

그러자 본격적으로 중국 전기차의 해외 시장 진출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현지에선 한국 전기차와 경쟁하려는 움직임이 매우 뚜렷하고 심지어 내연기관 점유율도 넘보는 중이다. 위협을 느낀 현대차그룹이 지난 4월 베이징모터쇼에 자동차 개발진 1,500명을 보낸 것도 중국의 전기차 굴기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전기차 부문에서 중국은 도전자가 아니라 경쟁자라는 방증이다.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을 떠올렸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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