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는 한국 경제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대기업 창업자들부터 미래를 짊어진 스타트업 CEO까지를 고루 조망합니다. 이들의 삶과 철학이 현직 기업인은 물론 창업을 준비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임 회장은 사업가가 아닌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광복을 맞으며 사표를 낸 그는 부산에서 가죽사업과 무역업을 시작했는데요. 일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수입제품들 틈에서 그가 본 것은 조미료였습니다.
일본의 조미료 ‘아지노모토’가 비싼 값에 팔리며 국내 시장을 장악하는 것을 본 임 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 조미료 제조 공정을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와 독자 기술로 한국 최초의 발효조미료인 ‘미원’을 내놓습니다.
1956년 탄생한 미원은 여러 후발 주자들의 등장에도 꿋꿋하게 버티며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데요. 가장 강력했던 경쟁 제품은 제일제당에서 만든 ‘미풍’. 미원은 미풍의 강력한 공세를 막아내며 압도적인 우위를 점합니다.
“세상에서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자식과 골프, 그리고 미원이다.” -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회장
1세대 조미료 경쟁에서는 완승을 거뒀지만 2세대 조미료 경쟁에서는 시장을 선점한 제일제당의 복합조미료 ‘다시다’에 1위를 내주게 됩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미원은 MSG의 유해성 논란이라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원은 여전히 ‘국민 조미료’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 MSG의 유해성 논란은 “안전하다”로 결론 났기 때문. 위기를 극복하며 전분, 전분당, 구연산 등으로 사업을 확대한 미원은 세계적 종합식품기업으로 발돋움하기에 이릅니다.
회사의 규모가 커졌어도 임 회장은 제품 개발과 경영에만 매진, 대외적으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회사와 집만 오간 그를 사람들은 ‘은둔의 경영자’라 불렀지요.
그뿐만 아니라 임 회장은 매우 검소한 것으로도 유명했는데요. 출퇴근과 출장은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임원들이 선물로 사준 벤츠 승용차도 시승조차 하지 않고 환불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공식적인 행사가 없으면 식사는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사무실에서 점심을 해결했고, 지방이나 해외로 출장을 가게 되면 비싼 호텔이 아닌 값이 싼 여관이나 여인숙을 이용할 정도.
양복을 한 번 구입하면 10년 이상 입었던 임 회장, 그는 평생 양복은 세 벌 이상, 구두도 한 번에 두 켤레 이상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골프는 분수에 맞지 않는다며 단 한 번 밖에 치지 않았던 임 회장의 검소함은 지어진 지 40년이 넘은 지금도 예전 모습 그대로의 외관을 유지하고 있는 사옥에서도 드러납니다.
임 회장은 1987년 장남인 임창욱 명예회장에게 회사를 물려준 후에도 2000년대 초까지 연구실에서 전통 장류를 포함한 식품 연구에 매진했는데요.
마지막 가는 길도 조용했습니다. 2016년 노환으로 별세한 임 회장의 장례식은 외부 조문 없이 가족장으로 치러졌습니다.
겉모습을 포장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내실을 다져왔던 임 회장. 그의 그런 성품이 ‘최초’와 ‘최고’ 두 가지 수식어를 거머쥘 수 있었던 원동력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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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이석희 기자
seok@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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