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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일자리 만들기와 성장

등록 2024.03.12 08:14

수정 2024.04.0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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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만들기와 성장 기사의 사진

노동시장 구조 개혁은 비단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 축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선 글 '대졸 시대와 저출산 고령화'에서도 다뤘듯이 변화한 인구 구성에 맞춰 노동시장을 맞추는 과정이어야 한다. 대졸자가 늘었으나 여전히 노동시장의 수요가 생산직에 맞춰져 있다면, 아주 단순하게 말해 대졸자를 생산직으로 쓰거나 대학 정원을 줄여 전문대와 고졸자로 학력 구조를 전환해 노동시장에 대응하든지, 대졸자들이 선호하는 일자리를 늘려 노동시장이 인구 구성에 맞추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생각해 보면 제조업이 고도화되는 과정에서 가공 단계에서 자동화율이 높아지고 로봇, AI의 활용이 늘어 생산직 수요가 줄어들고 있고, AI 외에도 다양한 공학계열 학사 이상 졸업자에 대한 인력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생산직의 수요를 적정한 수준에서 유지하면서, 엔지니어 비중을 높이는 방향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 제조업이 고도 되어 '스마트화' 또는 '디지털전환'에 돌입하게 될수록, 제조업은 HW(하드웨어)보다 시스템 통합을 위한 SW(소프트웨어)적인 요소를 크게 요구받게 된다. 따라서 제조 ICT 분야나, 생산 서비스 분야에서도 인력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생산직과 엔지니어의 구성이 심각한 '남초' 상태로 고착된 지 수십 년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규로 생성되는 분야에서 여성의 일자리와 '서비스' 계통의 인문사회계열 일자리 창출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지속적인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일자리 '설계'를 가능케 하기 위한 선제 조건이 있다. 바로 지속적인 경제와 산업의 성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력이 늘어야 경쟁력이 늘고, 경쟁력이 늘어야 산업이 고도화되고 또 성장하며, 그 결과물이 경제 성장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일자리 설계와 성장은 그저 '닭'과 '달걀'의 문제처럼 보인다. 순환논리를 피하기 위해서는 일자리 설계와 성장 각각이 어떠한 방식의 순환구조를 갖게 될지 역할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전체 인건비가 늘어나는 상황, 즉 일정한 이윤 확대 또는 매출 확대가 없다면,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해소 문제는 전형적인 '분배 게임'이 된다. 대기업 원청 노동자의 임금을 묶어 놓고 하청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경우(완만한 인건비 상승), 대기업 원청 노동자의 임금과 하청 노동자의 임금을 함께 올리는 경우(급격한 인건비 상승), 대기업 원청 노동자의 임금을 양보하여 하청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경우(균형) 모두 인건비 상승을 예정한다. 그전까지 대기업이나 하청기업 사측의 이윤 몫이 많았으므로 조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성장이 없을 경우 인건비 상승 폭은 제한적일 밖에 없다. 실제 20세기 초반 미국의 포드사가 노동자들의 인건비를 2배로 올려주거나, 1987년부터 노동자 대투쟁에서 제조업 노동자 전체의 인건비가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한 편에서는 호황(한국), 다른 한 편에서는 높은 수익률 덕택이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 문제와 같은 프레임 안에 있는 문제가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 간 '동반성장' 혹은 '공정 거래'일 테다. 이윤 몫에 대한 공정한 배분과 '단가 후려치기' 방지가 필요한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역시 매끄럽게 진행되기 위해선 말 그대로 성장이 필요해진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구체적으로는 '강소기업 만들기'와 '대기업 10개 만들기' 프로젝트가 함께 해야 한다. 우선 '강소기업 만들기'의 문제부터 살피자. 진보적인 경제학자나 노동 연구자 중 몇몇은 독일의 강소기업(Mittelstand)이 미래라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 대기업 한 곳에 종속되어 있는 '단사발주' 체제를 넘어서, 글로벌 기업에도 납품할 수 있도록 중소기업들의 역량을 키워줘서 강소기업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런데 글로벌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중소기업은 '강소기업'이 아닌, 규모를 확대해(성장해) '강한 중견기업'이 되어야 한다. 달리 말해 50인 미만, 100인 미만 기업의 통폐합이 필요해진다는 것이다. 투자를 늘리고 그 성과를 내기 위한 최소한의 '규모의 경제'를 확보해 성장할 전략이 필요해진다. 이런 성장 동력의 관점이 사라지면, 강소기업 만들기는 '대기업의 불공정 관행' 규탄이라는 게임 속에 갇히게 된다.

두 번째로 '대기업 10개 만들기' 프로젝트도 동반되어야 한다. 얼마 전 한국의 대기업 고용인원이 차지하는 비율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12% 내외라는 주장과, 30%가 넘는다는 주장. 은행같이 지점으로 쪼개져 있는 기업들의 지부를 합치면 30%가 넘고, 단일 사업장의 고용 인원을 기준으로 세면 12% 내외가 된다. 사실 30%가 맞는 주장일 테다. 그런데 이 문제가 예민한 까닭은, 숫자의 중요성이 아니라 대기업이 포괄하는 일자리가 임금이 많거나, 고용이 안정적이거나, 복리후생이 좋거나, 제도화가 되어 있다는 것 아닌가?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의 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러한 기업들이 기존 산업 생태계에서 든든하게 지탱하는 것과 별개로 새롭게 중소기업이 중견기업 되고, 중견기업들이 도약하여 대기업이 되는 성장이 없는 것이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의 환경 개선의 한계 아닌가? 특히나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수출하고 시장을 확장하며 성장하는 회사들의 경우, 반드시 국내에서 '치킨 게임'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성장하는 회사는 '유니콘'이 되고, 성장하지 않는 회사가 '좋좋소'의 대상으로 남는다. 어떤 기업에 다니더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그 수준을 나날이 개선해야겠지만, 이런 논의가 힘을 받기 위해서는 역시나 새롭게 성장하여 규모를 '대기업'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도전자 중견기업들이 필요해진다. 준거로 삼는 독일과 북유럽의 '균등한 임금'과 '동반성장' 모두, 제조업의 성장과 함께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혁신을 연구하는 정치학자 M. Z. 테일러는 '성장 없는 분배 논쟁'이 사회를 분열시키고 혁신의 역량을 소진시킨다고 말한다. "분배냐 성장이냐"는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다. 일자리 만들기와 노동시장 구조개혁 역시 성장의 관점과 병행하여 전개되어야 한다. 그게 지속 가능한 성장, 지속 가능한 격차 해소를 만들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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