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느와르’는 고리타분한 장르다. ‘퓨전’이 일반화 된 시점에서 ‘느와르’란 개념 자체는 구시대적 발상의 산물이란 평가도 있다. 바꿔 말하면 복고적인 트렌드다. 이게 2014년 여름 극장가를 수놓고 있다는 점은 디지털 세대의 아날로그 향수를 대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어불성설일가.
최근 ‘우는 남자’ ‘하이힐’ 등 느와르를 표방한 영화가 개봉했다. 이어 ‘황제를 위하여’가 개봉 대기 중이다. 3편 모두 ‘느와르’의 범주 안에서 얘기를 풀어냈다. 사실 가장 전형적인 느와르에 가까운 영화는 ‘황제를 위하여’다.
영화는 프로야구 선수 ‘이환’(이민기)의 얘기다. 승부 조작으로 급전 직하된 그는 황제캐피탈 사장 정상하(박성웅)의 눈에 들어 뒷골목으로 자신의 거처를 옮기게 된다.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조직 내에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점차 욕망에 사로잡힌 이환은 정상하의 모든 것을 넘보게 되고, 상하의 수하들은 이환을 제거하려 한다. 하지만 상하는 왠지 모르게 이환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 같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조직원들이 벌이는 살벌한 칼부림이 스크린을 장식한다. 좁디좁은 모텔 복도를 가득 메운 조직원들은 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 서로를 죽이고 죽는 살육의 현장 속에 던져진다. 관객들은 시작부터 강렬하게 빛나는 남자들의 욕망이 어떤 것인지에 궁금증을 터트리게 된다.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빛을 발하는 이환의 눈은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그것이 무언지는 나오지 않는다.
시종일관 불안하고 정제되지 않은 이환의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은 정상하다. ‘느와르’ 장르에서 등장하는 ‘브로맨스’(브라더+로맨스)의 축 가운데 모성적 느낌을 전달한다. 그는 이환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과거 모습을 찾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숟가락 하나 쥐어 주려고 한다”며 이환에게로 향하는 정상하의 모습은 영웅본색 속 ‘고영배’를 응징하기 위해 달려가는 ‘용사’ 혹은 ‘소마’(주윤발)와의 의리를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송자호(적룡)의 모습처럼 남성 관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냉혹한 프로의 세계 속에서 살아온 이환은 자신을 향한 동정이 낯설 뿐이다. 그래서 상하의 시선과 손길이 부담스럽고 거부했다. 하지만 하이라이트 시퀀스에서 등장한 두 사람의 모습은 ‘느와르’의 기본 공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의리’의 패턴을 정석화하며 따라간다.
정상하 역을 맡은 박성웅은 “‘황제를 위하여’ 속 상하와 이환의 마지막 요트 위 모습에 끌려서 출연을 결정했다”며 그 한 장면에 담긴 ‘느와르’의 진심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물고 물리는 배신 속에서 자신의 욕망만을 쫓는 불나방 같은 ‘이환’ 그리고 그런 이환의 모습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마음의 짐을 느끼는 정상하의 진심만으로도 ‘황제를 위하여’는 오랜만에 볼 수 있는 ‘느와르’에 가장 가까운 결과물이라고 보고 싶다.
물론 영화적으로 불편한 감성의 포인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배우를 배우가 아닌 도구로만 사용한 듯한 폭력적인 시선은 분명 매끄럽지 못한 연출의 실수다. 각 인물의 감정이 연결되는 개연성의 부족도 지적되고 있다. ‘작두’ 캐릭터의 이유 없는 등장도 거슬린다. 전반적으로 각각의 시퀀스 속에서 발생되는 서사의 이유가 부족한 것이 ‘황제를 위하여’의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하지만 연출을 맡은 박상준 감독은 ‘느와르’란 장르의 공식에 충실하고 싶었단 뜻을 밝힌 바 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 이 명제로만 보자면 ‘황제를 위하여’는 충분히 남성 관객들의 향수와 감성을 건드릴 만한 영화다. 우려했던 박성웅의 ‘이중구’가 스크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점도 새로웠다. 박성웅의 세밀한 캐릭터 해석력이 사실 ‘황제를 위하여’의 ‘느와르’ 완성도를 높인 1등 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환의 감정과 정상하의 진심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 두 남자의 대화 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황제를 위하여’가 말하고 픈 ‘느와르’의 진심이다. 개봉은 12일.
김재범 기자 cine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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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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