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EU가 기업결합 승인을 질질 끄는 배경은 '경쟁 제한' 우려입니다. 한국의 1‧2위 항공사가 하나로 합쳐지면 경쟁 환경이 훼손될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하지만 미국과 EU가 심사를 미루는 진짜 속내는 대한항공의 몸집이 커지는 걸 견제하기 위해서 일겁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자국우선주의'가 확산되고 있는데요. 해외 경쟁 당국은 대한항공의 합병이 자국 항공산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영국도 올해 3월 기업결합을 승인해 주는 대신 최대 7개의 슬롯을 자국 항공사인 버진 애틀란틱에 넘기라고 요구했죠.
따라서 해외 경쟁 당국의 승인을 모두 얻어내려면 슬롯과 운수권 반납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보유하고 있던 알짜노선들을 일부 내주지 않으면 미국과 EU의 기업결합 승인은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국내 항공산업의 체질 개선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 두 항공사의 합병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현재 우리 항공업계는 엄중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운항 차질이 장기화되면서 수익성에 치명상을 입었고, 과도한 부채 탓에 재무구조도 엉망입니다. 게다가 글로벌 경기 둔화 우려에 짓눌리며 화물 실적까지 부진한 상황이죠.
하지만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한다면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높게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특히 중복 노선을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기자재를 통합하면 비용이 감소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정비부품 수급과 운항승무원 교육 등에 들어가는 비용도 줄어들 겁니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과의 합병에 사활을 걸고 국제무대에서 고군분투 중인데요. 지난 2년여간 대한항공은 기업결합 심사 통과를 위한 법률비용에만 1000억원 이상을 쏟아 부었습니다. 조원태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들도 수시로 출장을 나가 해외 경쟁당국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특히 해외 경쟁 당국의 경쟁 제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신규 시장진입 후보 항공사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대한항공이 기업결합심사 통과를 위한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만큼 이젠 정부가 나서야 할 때입니다. 해외 경쟁 당국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과도한 시정조치 요구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외교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릴레이 정상회담을 이어가며 외교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다만 시기에 맞춰 정부가 우리 기업의 이익에도 외교력을 쏟아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자국우선주의에 기반해 자국 기업을 지키는 선진국들처럼 말이죠.
특히 저비용항공사(LCC) 면허를 남발한 정부는 항공산업의 위기를 자초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결자해지 차원에서라도 정부는 항공산업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적극 팔을 걷어붙여야 합니다. 물론 조용히 노력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번 해외 기업결합 심사 과정에서 정부가 눈에 잘 띄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번 기업결합은 한 기업의 생존이 아니라 항공산업 전체의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입니다. 외항사 대비 경쟁력을 차별화하고 원가 우위를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죠. 대한항공의 노력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해외 기업결합 심사가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길 바랍니다.
뉴스웨이 박경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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