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정차한 뒤 하차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면 그 승객은 원하는 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버스는 우리가 일어나서 내리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과 매우 가까운 자리라면 정차 후 일어나서 하차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탑승하고 있다면, 뚫고 지나가는 사이 버스가 출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3월 경기도의회 건설교통위원회 김동영 의원이 발표한 '경기도 버스 준공영제 제도에 대한 경기도민 인식조사'에서 버스 이용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54.7점이었다. 12가지 조사 항목 중 '승객 안전을 배려한 운행'의 만족도는 44.3점, 두 번째로 낮은 점수를 받았다. 불안한 하차 과정이 승객들에게 큰 불편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버스에 붙어 있는 안내문처럼 버스가 정차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하차하는 게 가능하려면, 내가 원하는 정류장에서 내리는 승객이 많거나, 승객이 거의 없고, 도로에 차가 별로 없는 시간대여야 한다. 서 있는 경우도 하차 시 상황은 비슷하다. 그렇다면 승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마 대부분 내릴 곳이 다가오면 미리 일어나서 문 앞으로 다가가 하차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런데 '다칠 수 있다'는 안내문의 내용처럼 버스가 이동 중일 때 자리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사고의 위험이 있다.
한국 소비자원에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접수된 버스 관련 민원 중 '미끄러짐(넘어짐 포함)' 282건, '부딪힘' 61건, '눌림(끼임 포함)' 58건 등 버스 내에서 이동 중이거나 서 있을 때 발생한 사고가 401건이다.
경기도버스운송사업조합 홈페이지의 교통불편신고 게시판에는 하차 시 불편에 대한 민원이 줄을 잇고 있다. 또한 서울시에 접수되는 시내버스 불편 민원도 절반 이상은 '승하차 전 출발 및 무정차 통과'에 대한 내용이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내리기가 어렵고, 미리 준비하려다가는 사고가 날 수 있다. 승객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딜레마에 빠지는 것은 승객뿐만이 아니다.
승객들의 하차 딜레마 대해 기사들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 우선 기사들에게는 시간이 없다. 배차 간격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시내버스 기사들은 배차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고, 평가가 낮으면 성과급이 줄거나, 회사로부터 징계를 받는 등 불이익을 받는다고 말한다.
서울 시내버스의 경우 시에서 각 운수회사를 평가, 약 230억원의 성과 이윤을 상위 40개 회사에 순위별로 차등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평가 항목 중 정시성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 기사들에게 배차 시간을 지키라고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도심의 혼잡한 교통 상황도 기사를 서두르게 만든다. 이러한 사정 탓에 기사들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승객의 하차를 종용할 수밖에 없다. 기사는 승객의 안전과 배차 간격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문제는 하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승차 역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유튜브 채널 한문철TV에 올라온 영상에 따르면 버스에 탑승해 자리에 앉으려고 이동하던 노인이 넘어져 다쳤다. 넘어진 노인은 외상성 경막하 출혈 진단을 받았고, 기사는 범칙금을 냈다. 노인 승객이 자리에 앉기 전에 급하게 출발해 사고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기사는 탑승한 승객이 모두 자리에 앉거나, 자리가 없는 경우 손잡이를 잘 잡았는지 확인 후 출발해야 한다. 기사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출발하는 이유는 대부분 하차와 같다. 승객의 안전과 배차 간격 사이에서 오는 딜레마 역시 동일하다.
그런데 다른 나라 버스도 상황은 비슷할까?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만 봐도 버스 승하차 풍경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승차한 승객이 자리를 잡은 뒤 출발하고, 하차할 때에도 승객이 내린 것을 확인하고 문을 닫는다. 일본 외 다른 선진국들도 비슷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승객이 제대로 내리기도 전에 버스가 출발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지난 12일에는 서울 당산동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하차 중이던 80대 노인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는 사망한 노인이 하차하면서 땅에 발을 딛기도 전에 버스가 급출발한 것이 원인이었다. 유가족에 따르면 피해 노인은 사망하기 몇 달 전에는 버스의 급정거로 다쳐 입원한 바 있었다.
우리나라와 일본 버스의 결정적인 차이는 안전에 대한 관점이다. 일본 등은 승객의 안전이 가장 우선이지만, 우리나라는 안전과 배차 간격의 우선순위가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의 버스 기사들이 안전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안전만을 고려하기엔 배차 간격이라는 부분이 너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승객들 역시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식의 변화만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개선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안전이 최우선으로 고려될 수 있도록 관련 법령 개정, 버스 운행에 관한 지자체별 제도 개선, 운수회사의 내부 규정 개선 등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모두 이뤄져 통해 누구나 안전하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뉴스웨이 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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