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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관념의 미학이 만들어 낸 완벽한 생명체

[무비게이션] ‘화장’, 관념의 미학이 만들어 낸 완벽한 생명체

등록 2015.03.18 16:40

수정 2015.03.18 16:52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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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 관념의 미학이 만들어 낸 완벽한 생명체 기사의 사진

감정이란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보이는 것 또한 그것이다. 그것이 존재하는 물체로 눈앞에 드러날 때는 감정이 아닌 ‘욕망’으로 변질된다. 결국 감정과 욕망은 두께 조차 알 수 없는 종이 한 장의 앞과 뒤를 상징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김훈의 동명 단편 ‘화장’을 스크린으로 옮긴 ‘거장’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연출작 ‘화장’은 종이 속 활자에 담긴 보이지 않는 것, 드러나지 않는 것을 끌어내야 하는 고도의 작업이었다. 김훈 작가 특유의 강렬한 필력 속에 담긴 한 남자 ‘오상무’가 가진 감정과 욕망의 차이는 밀리미터 단위의 시각에 따라 변질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임 감독과 영원한 국민 배우 안성기는 그 보이지 않은 무언가를 결국 잡아냈고 형상화 시켰다. 그렇게 94분 러닝타임은 완벽한 ‘스크린 명화’로 종이 속 활자에서 걸어나왔다.

제목 ‘화장’은 죽은 자의 육신을 불에 살라 장사를 지내는 화장(火葬)과 화장품을 바르거나 문질러 얼굴을 곱게 꾸미는 화장(化粧)의 중의적 표현을 지닌다. 주인공 오상무(인성기, 화장품 회사 상무다)의 다층적인 감성선은 화면을 따라가는 관객들의 공감과 이해 그리고 상상력의 경계선을 수시로 무너트린다. 사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관람’이란 개념보단 ‘동의’란 수준으로 넘어가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서편제’ 이후부터 자연을 벗으로 삼은 작품에 집중해온 노구의 이 거장 감독이 폐쇄성으로 가득한 ‘화장’ 속 인물의 감정과 갇힌 배경(장례식장, 병실)을 담아낸 것을 보면 어떤 식으로 든 밖으로 새어나올 수밖에 없는 감정의 물살을 힘으로 누른 채 끌고 가는 압박까지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거슬리지 않는 것은 그 압박이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표현력으로 화면을 따라간다. 결국 ‘관람’이 아닌 ‘오상무’란 인물의 행동과 감정을 어느 순간 ‘동의’와 ‘부정’의 반복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이미 영화가 아닌 실제의 인물들을 엿보고 있다는 지점까지 관객들을 ‘화장’은 끌고 간다.

 ‘화장’, 관념의 미학이 만들어 낸 완벽한 생명체 기사의 사진

‘화장’이 지금까지의 영화적 화법과 다른 흐름으로 이어가는 것은 ‘거장’(임권택 감독)의 터치도 아니며, 연기경력 59년차의 ‘국민배우’ 안성기의 열연도 아니다. 온몸을 드러낸 김호정의 불사름도 사실 논외 대상이다. 김규리의 판타지도 뒤쳐지는 점은 없다. 바로 추상과 반추상 그리고 극사실의 개념을 넘나들면서도 관객들의 시선을 너무도 강력하게 빨아들이는 특유의 새로운 화법이다.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상여’ 시퀀스는 압권이다. 판타지와 사실의 경계선으로 보여지는 이 장면은 오상무의 심리를 가장 사실적이며 날 것 그대로 담은 명장면이다. 일반적인 꽃상여가 아닌 새하얀 상여와 달리 검은 상복을 입고 그 뒤를 따르는 인물들. 하늘을 수 놓은 ‘만장’과 백사장인지 사막인지를 알 수 없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숨은 붉은 색 드레스의 추은주(김규리)는 기묘한 어울림을 상징한다. 죽음을 앞둔 스러져가는 아내(김호정)는 오상무에겐 그저 ‘사’(死)의 의미로만 다가올 뿐이다. 식은 애정도 감정의 메마름도 아니다. 그런 단계에서 설명하기에 오상무가 가진 ‘화장’의 의미는 너무도 깊다. 흰 상여와 검은 상복으로 표현된 관념화된 죽음의 의미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여인 은주가 바로 ‘생’(生)이란 의미로 다가오기에 영화 제목 ‘화장’의 중의적 표현이 가능하단 은유를 전달한다.

 ‘화장’, 관념의 미학이 만들어 낸 완벽한 생명체 기사의 사진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오상무는 거의 매일 생(추은주)과 사(아내)의 반복을 경험한다. 재발된 암으로 죽음을 앞둔 아내의 모습은 생의 굴곡안에 살고 있는 오상무를 서서히 무너트리고 있다. 병실 속 아내 곁의 오상무는 이미 생의 기운을 잃은 말라버린 화초와도 같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부하 직원 추은주와의 모습에선 그 어느 때보다 생의 기운으로 넘쳐난다. 곁눈질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 흔들리는 감정을 느끼고 어느 순간 눈이 가고 몸이 가며 마음이 흐르고 있는 것을 느낀 지점에 다다르자 오상무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자책 번민으로 괴로워한다. 이런 지점은 그의 살아있는 감정을 말한다. 회식 자리에서 은주를 바라보는 오상무의 깊은 눈빛은 정리될 수 없는 감정의 굴곡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남자로서 느끼는 감정의 건강함이다.

물론 영화 ‘화장’을 통해 오상무의 마음에 공감과 동의를 전달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인간의 감정을 텍스트로 정리할 수 없는 사실은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병든 아내와의 섹스를 통해서도 드러난 적나라한 감정의 흔들림은 이 질문의 해답을 던지고 있다. 몸은 죽음 직전의 아내와 합쳐진 상태이면서도 머리와 마음이 나신의 은주를 떠올리고 있으니 인간의 정리될 수 없는 감정은 그 오묘함의 극치를 떠올리게 한다.

 ‘화장’, 관념의 미학이 만들어 낸 완벽한 생명체 기사의 사진

사실 이쯤 되면 오상무는 죽음의 다른 그림자인 아내를 버리고 은주와의 새로움을 꿈꿀 수 도 있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은주가 내민 청첩장에 실망감을 드러내며 건낸 축의금 봉투가 한 낱 자신의 생을 붙잡고 있던 감정의 값어치였다면 오상무에겐 사치일까. 아내의 죽음 뒤 자신을 찾아온 은주와 그런 은주에 대한 번민에 결론을 내린 오상무의 선택은 그래서 ‘화장’이란 중의적 의미와 아내 그리고 은주가 담고 있는 생과 사의 두 얼굴이 결코 떨어질 수 없으면서도 붙을 수도 없고 그 간극이 한 낱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단 점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회고전 형식으로 첫 공개가 이뤄지면서 언론에 오르내린 ‘아내’ 김호정의 헤어노출 장면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본다면 그 장면이 담고 있는 처연한 분위기에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화장’, 관념의 미학이 만들어 낸 완벽한 생명체 기사의 사진

올해 팔순에 접어든 ‘세계적 거장’ 임권택 감독의 심미안과 안성기 김호정 김규리가 그려낸 바닥을 알 수 없는 섬세한 터치는 텍스트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이와 공감 그리고 동의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완벽한 ‘스크린 명화’다. ‘화장’은 94분 동안 분명 살아 숨을 쉰 생명체였다. 개봉은 4월 9일.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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