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금 ‘역대 최장’ 행진, 13조 4917억원 팔아동학개미 “증시 상승세 찬물”···반발 여론 확산국민연금 “자산비중 조절 차원, 불가피한 상황”비중 축소는 해외 투자 수익이 월등하기 때문
“연기금의 국내 주식 보유 비율을 높여 개미들의 눈물을 닦아달라”
“주가지수 하락의 주범 연기금,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해체”
국민연금을 필두로 하는 연기금이 코스피 시장에서 역대 최장기간 매도 랠리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이 같은 제목의 글들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하반기 주식에 처음 입문한 50대 ‘주린이(주식+어린이 합성어)’라고 소개한 한 청원인은 “주식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는 것이 많아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연기금의 매매 형태”라고 토로했다.
연기금의 대규모 매도 폭탄으로 국내 증시 상승세에 제동이 걸리자 개인투자자들, 이른바 ‘동학개미’들은 역대 최장기간 매도 행렬에 나선 연기금을 코스피 지수 하락의 주범 중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
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연기금은 국내 증시에서 지난해 12월 24일부터 전날까지 43거래일 연속 순매도했다. 즉 올해 들어서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주식을 팔아치운 것이다. 이는 2009년(8월 3일~9월 9일) 세웠던 28일 연속 순매도를 훌쩍 뛰어넘는 역대 최장기록이다.
이 기간 연기금이 팔아치운 국내주식 규모 13조4917억원으로 지난해 전체 순매도 규모의 3배가 넘는 수준이다. 만약 개미들이 연기금이 쏟아낸 물량을 사들이지 않았더라면 국내 증시 하락 폭이 더 커졌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다음은 연기금 매도와 관련해 증권업계 전문가들의 설명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한 것.
Q. 연기금 대량 매도, 대체 왜?
A. 연기금의 주식 매도는 주가 상승에 따른 자산배분 차원으로 풀이된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국내와 해외 주식과 채권, 부동산 등 자산에 따라 매년 일정 비중을 정해놓고 있으며, 비중을 초과할 경우 다시 배분한다.
지난해 5월 국민연금 기금위는 해외주식 비중을 늘리는 대신 국내주식 비중을 2025년까지 15% 내외로 축소하는 내용을 담은 중기자산배분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2021년 말 목표 국내주식 비중은 지난해 대비 0.6%포인트 낮아진 16.8%로 제시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작년 말 기준 보유한 국내주식 가치가 176조6960억원으로 전체 금융자산 중 비중이 21.2%에 달한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올 연말 목표치보다 4.4%포인트나 높은 것이다. 즉 지난해 11월부터 코스피가 급등세를 타면서 자산 비중이 늘어났고, 이에 목표한 비중을 맞추기 위해 급히 비중 축소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Q. 추가 매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데.
A. 국민연금이 전체 금융자산에서 국내주식 비중을 올 연말 자산배분 목표치인 16.8%에 맞추려면 23조7000억원 가량을 추가 매도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올해 들어 현재까지 코스피는 4.85% 상승하는 등 국내 주가는 작년 말보다 오히려 더 올랐다. 또 연초 이후 채권 금리 상승(채권 가격 하락)으로 국민연금 금융자산 중 채권 비중이 작아져서 주식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졌을 것이 확실시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국민연금이 앞으로 팔아야 할 국내 주식 규모가 24조원보다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만약 올 들어 지금까지 보인 속도로 국민연금이 순매도를 지속한다고 가정하면 6월 무렵까지는 계속 주식을 팔아야 연말 목표치에 도달하게 된다.
Q. 개인투자자들의 반발이 거센데, 국민연금의 입장은?
A. 연기금 매도를 놓고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국내주식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 ‘연기금이 그간 박스피(박스권+코스피)의 주범’, ‘이미 목표치를 달성했는데도 차익실현을 위해 더 팔고 있다’는 등의 비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다. 올해 초부터 펼쳐진 코스피 대형주의 강한 상승 랠리는 연기금의 국내주식 비중을 더욱 높였을 것이기 때문에 연기금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연기금은 포트폴리오 리밸런싱 과정에서 주가 급등 시 주식매도 우위를, 채권 강세 시 주식 매수 우위를 보여왔다. 특정 자산 가격이 크게 상승할 경우, 포트폴리오 리밸런싱 과정에서 목표 비중 초과분에 대한 매도세는 불가피하다.
또한, 연기금은 지난해 코로나19 위기 때는 지금과 달리 1조원 넘게 주식을 사들이며 소방수 역할을 했고 지난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 때도 국내주식 비중의 상하한선을 유연하게 늘려 주가를 방어해냈다. 연기금의 속성이 국내 증시 변동성을 줄여준다는 점과 장기적인 관점에서 글로벌 자산배분은 필요하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Q. 하지만 투자자들의 반발이 크다면, 국내주식 비중을 조정해도 되지 않나.
A. 연기금의 올해 자산배분 목표가 지금과 같은 증시 강세장이 나타나기 전인 작년 5월 설정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올 연말 목표 비중이 바뀌거나 내년 말 목표 비중이 올해보다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국민연금은 국내주식 목표 비중을 줄이고, 해외 주식 투자를 확대해나가는 추세다.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목표 비중은 2016년 20%, 2017년 19.2%, 2018년 18.7%, 2019년 18%, 2020년 17.3%, 올해 16.8%로 점차 줄어든 반면 해외 주식 비중은 2016년 13.1%에서 올해 25.1%로 대폭 늘었다.
이는 해외 주식 투자 수익률이 국내주식 수익률을 월등히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연금 운용이 시작된 1988년 이후 2019년까지 해외 주식 연평균 수익률은 10.09%로 국내주식 수익률(5.99%)의 1.7배에 달했다. 최근 5년간(2015∼2019) 기금 평균 수익률도 국내자산 3.69%, 해외자산 10.06%로, 해외투자의 성과가 2배 이상 높았다.
Q. 수익률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국민연금은 앞으로도 해외투자 비중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국내 시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자산이 쌓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기금 적립금은 전년 말 대비 97조1000억원 증가한 833조7000억원까지 불어났다. 이 같은 추세라면 2024년에는 적립금이 1000조원 이상으로 늘 것으로 추산된다.
즉 기금운용 규모가 지속해서 확대됨에 따라 국내 투자의 한계를 극복하고 투자 위험을 분산하며 향후 급여 지급을 위한 자산 매각을 할 때, 국내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확대가 불가피한 상황인 것이다.
이에 기금위는 2025년 말까지 해외투자 규모를 55%(주식 35%, 채권 10%, 대체 10%) 수준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계획대로 해외투자 비중이 늘게 되면 국민연금은 500조원가량의 국외 자산을 굴리는 ‘글로벌 큰손’으로 성장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국내 시장의 성장과 지난해 증시 상승의 주역인 동학개미들의 의견을 반영해 국내 주식 투자 비중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코로나19 이후 상대적으로 유럽이나 기타 아시아 국가들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국내 증시 그리고 한국 기업에 대한 메리트가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한 글로벌 투자 확대 원칙을 여론에 못 이겨 재조정한다면 국민연금의 기금운용 자율성과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
한편, 개인주식투자자 권익보호단체인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한투연)는 오는 4일 전주에 위치한 국민연금 본사 앞에서 국민연금의 ‘과매도’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 예정이다.
정의정 한투연 대표는 “지긋지긋한 박스피를 벗어나 13년 만에 봄이 찾아온 국내 주식시장에 국민연금이 차디찬 얼음물을 끼얹고 있다”며 “국민연금은 기금 운용 원칙에 있는 수익성 및 공공성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데, 최근의 매도 폭탄은 공공성을 위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비판했다.
뉴스웨이 고병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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