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동북아 역내 동맹이면서 중국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에게 미국, 중국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관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외교적 과제다.
미중 전략경쟁이 심화하고 '한미일 대 북중러' 등 진영 구도가 굳어질수록 한국이 외교적 공간을 확보하기는 어려워진다. 미중 갈등이 격화하는 것이 큰 틀에서 한국 외교에 제약 요인으로 작동할 우려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3일 관측했다.
대만 문제는 미중 갈등 구도에서도 가장 인화성 높은 이슈다. 펠로시 의장의 이번 대만 방문이 양측 모두의 수위 높은 대응을 불러일으키며 일촉즉발 대립으로 번진 이유다.
한국 정부도 이번 방문이 미중 갈등 등 역내 상황에 미칠 영향을 주시하고 있다. 공개적으로는 원칙적 반응만 내놓으며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는 모양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에 "우리 정부는 대화와 협력을 통한 역내 평화와 안정이 필요하다는 기조 하에 역내 당사국들과 제반 현안에 관해 긴밀한 소통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만 문제를 둘러싼 미중 긴장이 고조될수록 한국의 입장이 더욱 선명해져야 한다는 부담이 커질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 시기인 지난해 5월 한미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한미 간의 공동 문서에 대만해협 관련 언급이 계속해서 들어가고 있다. "대만 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등의 원론적 언급이지만 다른 나라가 대만 문제를 논의하는 것 자체를 내정 간섭으로 여기는 중국은 강하게 반발해왔다.
미국은 중국의 대만 주변 무력시위가 일방적인 현상변경 시도라며 '규범에 기반한 질서'를 지키는 데 동맹과 우방국들이 동참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펠로시 의장이 대만 도착 성명에서 "전 세계가 독재와 민주주의 사이에서 선택을 마주한 상황에서 2천300만 대만 국민에 대한 미국의 연대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언급한 데서 보듯 미국 주류는 이 문제를 '가치 대결'의 시각에서도 보고 있다.
국립외교원 김한권 교수는 "(미중 간) 군사안보적 긴장은 높아지겠지만 양측 다 물리적인 충돌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대신 현재 부상하는 진영 구도에서 미국은 자유 진영 국가들을 결집하고 나토 동맹국과 인도태평양 지역의 동맹 및 파트너를 연계시키는 또 다른 계기로 활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펠로시 의장이 대만 방문 후 다음으로 향하는 행선지가 한국이라는 점은 이런 맥락에서 특히 관심을 끈다.
아시아 순방 중인 펠로시 의장은 대만 방문 일정을 마치고 이날 오후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다.
오는 4일 오전 카운터파트인 김진표 국회의장과 회담한 뒤 공동 언론발표를 할 예정인데, 이 자리에서 펠로시 의장이 직전 방문지인 대만, 또는 인도태평양 지역 상황에 대해 언급을 할지 주목된다.
물론 펠로시 의장은 의회 인사이기 때문에 그의 입장이 곧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은 휴가 기간, 박진 외교부 장관은 캄보디아 아세안 외교장관회의 참석으로 자리를 비워 한국 정부 주요 인사들과의 회동도 적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 권력 서열 3위 인사로서 그의 발언이 만만치 않은 무게감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대만 문제를 고리로 미중간 갈등이 고조되고, 북중관계가 밀착하면 북핵 등 한반도 문제 해결에도 어려움이 가중될 소지가 있다. 북핵 문제는 미중이 협력해야 할 대표적 사안이기 때문에 양국의 '갈등 관리'가 원활히 이뤄질수록 해결을 위한 공간도 넓어진다.
북한은 이날 외무성 대변인이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미국의 파렴치한 내정간섭 행위와 의도적인 정치군사적 도발책동이야말로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해치는 화근"이라며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을 비난하고 중국과 공조를 과시했다.
다만, 미중이 비핵화라는 원칙에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고 올해 가을 제20차 당대회를 앞둔 중국이 한반도 안정을 필요로 하는 것은 여전하다는 시각도 있다.
아울러 미국과 중국이 모두 펠로시 의장의 방문과 관련해 대외적으로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데는 국내 정치적 의도가 담겼다는 분석이 많다. 한국도 미중의 대외적인 대응과 국내 정치적인 대응을 분리해 이해하고 이에 맞춰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한권 교수는 "국제사회 다자 무대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의 문제를 다룰 때는 지금보다 좀 더 선명한 모습을 취하되 중국과의 양자 관계에서는 절제된 용어와 세밀한 메시지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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